화제의 책

시설 거주인 아닌 한 사람으로 서기까지…징검다리 된 국내 첫 '탈시설 운동'

오경민 기자

집으로 가는, 길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X인권기록센터 사이 기록·홍은전 외 6명 글 | 오월의봄 | 352쪽 | 1만8000원

[화제의 책]시설 거주인 아닌 한 사람으로 서기까지…징검다리 된 국내 첫 '탈시설 운동'

“튼튼한 돌 한두 개면 누구든 강을 건널 수 있는데, 한국 사회는 이 돌을 두고 있지 않다.”

2016년 별세한 이종각 평원재단 이사장의 말이다. 강 한쪽은 장애인 ‘시설’, 다른 한쪽은 지역사회를 의미한다. 비장애인은 당연하게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지역사회에, 시설 거주 장애인들은 닿고 싶어도 닿을 길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탈시설한 장애인들이 서울에서 살 곳을 마련하기 전 자립생활을 준비할 수 있도록 ‘평원재’라는 공간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인근에 마련했다. 그는 “탈시설 장애인이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치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인 평원재가 그 징검다리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탈시설은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개인별 주택에서 사회서비스를 제공받으며 자립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집으로 가는, 길>은 국내 최초의 탈시설 운동으로 불리는 경기 김포시 장애인 거주시설 ‘향유의집’ 폐지 운동에 관한 기록이다. 향유의집은 회계부정 비리, 거주 장애인 인권 침해 등이 일상인 곳이었다. 향유의집에 20년 넘게 산 한규선씨는 2006년 자신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장애수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TV를 통해 알게 됐다. 한씨는 향유의집의 장애수당 횡령 의혹을 고발한 뒤 2008년 그곳을 나왔다. 이듬해 김동림씨, 김용남씨, 김진수씨, 방상연씨, 주기옥씨, 하상윤씨, 홍성호씨, 고 황정용씨가 뒤이어 향유의집을 나와 마로니에공원을 거점으로 탈시설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농성 두 달 만에 서울시는 ‘자립생활주택’ 지원 등 탈시설 정책을 약속했다. 서울을 시작으로 각 지자체와 중앙 정부가 탈시설 정책을 차례로 마련했다.

직원들과 거주 장애인들,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 향유의집을 운영하던 석암재단을 ‘사회복지법인 프리웰’로 바꾸고, 2013년 비리 관계자들을 몰아냈다. 2018년에는 거주인 모두를 안전하고 빠르게 탈시설시킨 뒤 시설을 폐지할 것을 의결했다. 2021년 4월30일, 120명이 넘는 장애인이 살던 시설은 정말로 모두를 자립시킨 뒤 사라졌다.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사회를 설득하고 비리 관계자를 내쫓는 것도 힘들었지만, 함께 운동을 하던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처음에는 재단비리를 함께 고발하던 직원들이 ‘이만하면 됐다’고 하기도 했고, 거주 장애인 당사자도 탈시설을 두려워하며 ‘시설에 남고 싶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탈시설’이란 구호는 향유의집이 일터인 이들에게 자괴감과 일자리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안겼다. 생활재활교사이자 사무국장이었던 강민정씨는 “나쁜 기억만 있지는 않을 텐데 향유의집이 그 정도로 싫었나 싶었다. 내가 근무하는 곳이 누군가에게는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이라는 걸 확인하니 종사자로서 죄 짓는 느낌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설 밖 삶을 경험하며 당사자들도 용기를 냈다. 자립생활을 체험한 장애인들은 모두 향유의집을 떠났다. 변해가는 장애인들을 바라보며 직원들도 생각이 달라졌다. 시설을 나간 장애인의 표정이 달라졌더라, 사람이 커졌더라 등의 말이 직원들 사이에 돌았다. 강씨는 말했다. “마트에 갔다가 장 보러 온 장애인을 보면요, 그 사람은 더 이상 거주인이 아니고 한 명의 사람이에요. 지적장애인 1급 누구누구가 아니라, 장 보러 온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직원들도 느꼈어요. 힘들 줄 알았는데 저렇게 다 살 수 있고, 활동지원사가 옆에서 도와주니까 가능하다는 걸.” 1960년 캐나다의 한 주정부가 탈시설을 추진할 때도 장애인 부모들이 소송을 불사하며 반대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이 가장 열렬한 찬성자가 되기까지는 30~40년의 시간이 걸렸다.

탈시설을 위한 자원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준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장애인들을 시설에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인터뷰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순차적으로 예산이 투입될 것이라는, ‘나중에’라는 말을 믿고 물러나면 장애인의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들은 경험적으로 안다.

“누구라도 그렇듯 인생의 당연한 과제인 내 몫의 삶을 내가 책임지며 살고 싶습니다.” 2008년 4월20일 장애인의날 행사에서 한 당사자가 말했다. 이동권, 탈시설 등 장애인의 권리는 당연한 듯하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던, 구호에 불과했던 말들이 실현된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다. 기록에 참여한 홍은전 작가는 “믿어지지 않는 말을 진지하게 자꾸 반복하는 이들을 믿고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믿어지지 않는 세계를 살아가게 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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