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적을 꿰뚫어보고 인류를 구한 천재 과학자…사후 70년 지나서야 세상은 그를 알아봤다

블레츨리 파크의 추억(2) - 튜링의 꿈과 좌절,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무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독일군의 암호 ‘에니그마’ 해독해 2차 대전 종식 앞당긴 앨런 튜링
‘튜링 머신·튜링 테스트’ 등 컴퓨터 원형·인공지능 개념도 태동시켜

우리가 흔히 ‘영국’으로 부르는 유럽 섬나라의 정식 명칭은 ‘대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영국을 지도에서 찾아보면 두 개의 큰 섬이 나오는데 동쪽의 큰 섬인 대브리튼(Great Britain)의 잉글랜드(England)·스코틀랜드(Scotland)·웨일스(Wales)와 서쪽의 작은 섬인 아일랜드 북동에 자리한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가 연합하여 만든 왕국이다. ‘영국’이라는 말은 그 가운데 인구수와 영향력이 제일 큰 잉글랜드에서 나왔지만 지금은 연합왕국 전체를 가리키기 때문에 네 개 구성국이 따로 출전하는 국제 축구 경기에서 ‘잉글랜드’를 ‘영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케임브리지에서 출발해 블레츨리 파크로 보너빌을 타고 가는 나의 눈앞에는 역시 낮은 구릉이 주욱 이어진 전형적인 잉글랜드 지형이 펼쳐져 있었지만, ‘50년 만의 폭서’라고 하는 날씨에 푸른 잔디는 온데간데없이 노랗게 탄 풀로 덮여 흡사 미국 서부 뉴멕시코의 사막을 보는 듯한 묘한 풍경이었다. 정말 더위와 가뭄이 얼마나 심했는지, 물이 말라버린 저수지 바닥에서 약 1600년 전 지어진 고대 로마제국의 마을들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흔한 저수지의 물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세계사를 뒤흔들었던 대제국의 흔적이 밭밑에 널려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뜨겁고 메마른 바람을 맞으며 마침내 도착한 블레츨리 파크.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암호를 풀기 위해 만들어진 연구시설로서 수도 런던과 영국의 최고 대학인 케임브리지·옥스퍼드를 잇는 삼각형의 가운데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는 여러 과학자·수학자 외에도 퍼즐을 잘 푸는 이들을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온 사람들이 모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봉사하였고, 지금은 그 역사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서 우리 같은 과학과 역사의 애호가들을 맞아준다.

이곳의 업적 가운데 제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 바로 ‘수수께끼’라는 뜻을 가진 독일 해군의 에니그마(Enigma) 기계를 해독한 일이었다. 잠수함이나 야전에서 갖고 다니며 쓸 수 있는 소형 타자기처럼 생긴 에니그마는 여러 개의 톱니바퀴와 배선반 연결 조합을 통해 한 글자를 다른 글자로 변환해주는데, 이 톱니바퀴와 배선반의 조합이 매일 OTP(One-Time Pad)에 기반해 바뀌기 때문에(OTP를 모르겠으면 지난달 퓨처라마 필독!) 이 암호가 풀리기 전까지 독일 해군이 대서양에서 연합군 상선들을 쉬지 않고 격침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에니그마 실물, 앨런 튜링의 책상, 블레츨리 파크 풍경(왼쪽 사진부터 시계 방향). 박주용 제공

에니그마 실물, 앨런 튜링의 책상, 블레츨리 파크 풍경(왼쪽 사진부터 시계 방향). 박주용 제공

에니그마를 해독한 사람들 가운데 제일 유명한 것이 앨런 튜링(Alan Turing·1912~1954)이다. 2014년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의 주인공 인물이기도 한 튜링의 이 업적은, 2차 대전이 끝난 뒤 영국 정부에서 발간한 공식 정보전 역사서에서 2차 대전 종식이 2년 정도 빨라졌으며 약 1400만명이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튜링은 이것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과학 업적을 몇 가지 더 남겼다. 그 가운데 제일 대표적으로는 현대 컴퓨터의 이론적 기초가 되어준 ‘튜링 머신(Turing machine)’이라는 일종의 자동 계산기계가 있고, “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가(Can machines think)?”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사람과 같은 지능을 지닌 ‘인공지능’ 기계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킨 일이 있다. 특히 그가 제안한 ‘튜링 테스트’라는 개념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인공지능의 본질과 성능을 논의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유용한 개념이다.

튜링 테스트는 다음과 같은 ‘따라하기 놀이(imitation game)’의 개념에 기반해 있다. 이 놀이에서는 A, B, C 세 명의 사람이 각방에 들어앉아 있다. 남자인 A와 여자인 B는 C와 서로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다. C는 이러한 소통을 통해 A와 B의 성별을 맞혀야 하는데, A와 B의 목적은 C로 하여금 자기가 여자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즉 “A가 여자 위장 연기를 매우 잘하여 C로 하여금 진짜 여자인 B와 구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C의 입장에서는 A를 진짜 여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튜링은 ‘기계가 인간과 같다’는 표현의 의미를 추론해내게 된다. 즉 이 놀이에서 A를 인공지능으로, B를 사람으로 설정한 뒤 C로 하여금 A를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기계 A는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 속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오리처럼 생겼고, 오리처럼 헤엄치고, 오리처럼 꽥꽥거리면 오리일 거야(If it looks like a duck, swims like a duck, and quacks like a duck, then it probably is a duck)”라는 18세기 속담을 알 수도 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이걸 ‘오리 테스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튜링 테스트는 그보다 역사가 조금 더 긴 오리 테스트의 첨단기술 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파시스트에 대적한 연합군의 2차 대전 승리, 현대 컴퓨터의 원형 발명, 그리고 인공지능의 태동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이름을 걸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튜링이지만 블레츨리 파크에서 그가 일하던 책상은 여느 사무실과 다를 바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겉보기에 저렇게도 평범한 사람이 저런 큰일들을 여러 가지 해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까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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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류에 거대한 선물들을 안겨준 튜링은 살아생전에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는 못했다. 독일군에게 이기고 돌아온 참전용사들이 그들을 영웅이라고 불러주는 이웃들에게 둘러싸여 밤을 새워(아마도) 맥주와 에일을 파인트로 들이마시며 쉼 없이 무용담을 풀어내고 있었을 시간에 존재가 국가기밀로 분류된 블레츨리 파크의 영웅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1000만명이 넘는 목숨을 살려냈으면서도 “누구는 죽어갔는데 너는 운 좋게 본토에 남아서 편하게 전쟁을 피한 것이냐”는 비아냥을 듣는다고 해도 아무 말을 못하는 겁쟁이로 치부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가 전쟁의 포화에 휩쓸려 있었을 몇 년 뒤인 1952년에 튜링은 집에 든 강도를 신고했다가 당시 법으로 금지되었던 동성연인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범죄자가 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감옥에 가지 않는 조건으로 암호학과 계산학 연구를 금지당하고 강제로 약물을 투여받는 수모를 당하게 된 튜링을 돕기 위해 블레츨리 파크의 동료들은 그가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지킨 영웅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달라고 정부에 요청했지만 또다시 좌절당하였고, 자신이 탄생시킨 인공지능의 꿈을 더 이상 좇을 수 없었던 튜링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1954년 마침내 청산가리에 젖은 사과를 베어먹은 뒤 스스로 세상을 떠난다.

아담과 하와가 먹은 선악과가 전통적으로 사과로 묘사되고, 뉴턴(튜링의 대학 동문)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이야기에서 보듯이 사과는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지혜와 각성을 상징하는 영험한 과일이다. 이것을 몰랐을 리 없는 튜링이 마지막 행위로 사과를 베어먹었다는 것은 지식의 탐구를 못하게 강제한 세상을 향한 과학자의 마지막 항의였다고 생각된다. 다행히 지금 우리는 최고의 컴퓨터 과학자들에게 ‘튜링상’을 수여하고, 한 입 베어먹은 사과 로고가 새겨진 컴퓨터와 일상의 매 순간을 함께하고 있고, 잉글랜드 중앙은행(Bank of England)에서 발행하는 50파운드 지폐에 튜링의 얼굴이 그려진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조금씩은 정의를 찾았다고 할까.

그러나 그가 사회에 해를 끼친 ‘범죄자’ 꼬리를 영국 여왕의 사면을 통해 뗄 수 있었던 것은 불과 2013년의 일이었다. 튜링은 사람들의 경멸 속에 죽음으로 몰린 뒤 70년 동안, 또 튜링에게 감명받은 애플사가 Apple Ⅱ+라는 컴퓨터로 개인 컴퓨터 시대를 열어젖힌 1979년 이후로도 34년 동안 차가운 사회의 눈에는 한낱 전과자였을 뿐이다. 작금의 어떤 나라 권력자들이 인류와 문명 진보를 위해 튜링이 한 일의 1000분의 1, 1만분의 1도 하지 못한 주제에 자신들 죄는 아예 묻지도 못하게 하는 데 골몰해 있는 세태를 보고 있자면 튜링과 같은 천재성도 권력을 갖지 못한 죄를 어찌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말로만 들어오던 블레츨리 파크를 방문하여 승리의 역사의 흔적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면 응당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겠지만, 튜링의 인생은 세상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고 합당한지 알지 못하는 그릇된 사람들의 존재를 곱씹도록 하였고 나는 끝내 입속에서 쓴맛을 씻어버리지 못하였다. 에니그마의 해독으로 적군의 마음속을 꿰뚫어볼 수 있게 해주고, 사람의 형상을 가진 기계를 만들어내는 신 같은 능력의 문턱까지 데려다 놓아주기까지 했으면서도 마음이 닫히고 생각이 짧은 국민들의 눈과 마음에 그의 진정한 가치는 드러나지 못하였다.

사실 마음과 마음을 잇는 소통의 문제는 사회적 동물인 인류가 존재하던 내내 스스로에게, 또 서로에게 끊임없이 던진 질문이다. 특히 다른 동물이 갖고 있지 않은 아주 정교한 소통의 도구인 ‘언어’를 갖고 있으면서도 인간은 쉬이 마음의 벽을 거두어내지 못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언어. 사람 사이에 깊은 소통을 가능하게도 하지만 때로는 목숨까지 빼앗는 치명적 오해를 낳기도 하고, 두고두고 가슴에 간직해야 할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눈와 귀를 영원히 닫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추한 오물로 떠돌며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는 것. 이러한 ‘언어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자문하다가 길을 돌려 케임브리지 서쪽의 ‘어센션 교구 묘지(Ascension Parish Burial Ground)’로 향했다. 그곳엔 언어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1889~1951)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무덤 안에 누워 있는 그에게 대답을 얻으려고 한 무모한 시도의 결과에 대해서는 훗날 다시 이야기해보고 싶다.

065 119 097 105 116 032 116 104 101 032 100 101 097 102 101 110 105 110 103 032 115 105 108 101 110 099 101 044 032 109 121 032 102 114 105 101 110 100 115 046(Await the deafening silence, my friends·친구들, 귀가 터져나갈 듯한 침묵을 두고보시게).

▶박주용 교수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26) 적을 꿰뚫어보고 인류를 구한 천재 과학자…사후 70년 지나서야 세상은 그를 알아봤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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