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 든 '5·18 꼬마 상주'가 아빠와 함께 쌓은 '봄꿈'

이영경 기자
한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잡힌, 아버지 영정 사진을 손에 든 다섯살 조천호군의 사진.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잡힌, 아버지 영정 사진을 손에 든 다섯살 조천호군의 사진. 경향신문 자료사진

어떤 진실은 누군가 감추려 하거나, 너무 비극적이어서 뒤늦게 알려진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이 그랬다. 1987년 6·29선언 이후에야 5·18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이뤄지면서 광주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들이 알려졌다.

1988년 5월 15일, <강아지똥>의 동화작가 권정생은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있는 동그란 눈매의 조천호군의 사진을 처음 보았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마구 죽어나가던 비극을, 그 속에 다섯살 천진한 아이의 아버지가 있었다는 슬픔을 8년이 지나도록 모르고 살았던 자신을 책망했다. 그 마음을 견딜 수 없어 ‘경상도 아이 보리문둥이가…광주의 조천호 군에게’라는 편지로 썼다. 원고는 미공개 상태로 머물다 지난해 공개됐고, 33년이 지나서야 마흔이 넘은 조천호씨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조씨는 차마 자신의 두 아들에게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지 못했다. 너무 깊은 아픔은 말이 되기 힘들다.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나서야, 조씨는 아이들에게 간신히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해줄 수 있었다. 그림책 작가 고정순의 신작 <봄꿈>(길벗어린이)를 통해서다.

“지난해 9월, 조천호씨를 만나러 광주로 갔어요. 권정생 선생님의 편지를 그림책으로 만들어도 되겠냐는 허락을 받고 싶어서였죠. 흔쾌히 좋다고 답하셨죠. 아직 아이들에게 사진 속 영정을 든 아이가 자신이라고,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를 전하지 못했다며 책으로 대신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죠.”

<봄꿈>(길벗어린이)은 돌고 돌아서 뒤늦게 도착한 편지다. 조씨와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권정생의 편지를 그림책으로 펴낸 고정순(47)을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1980년 광주에서 아버지 영정을 들고 있던  다섯살 조천호군에게 동화작가 권정생이 쓴 편지를 바탕으로 그림책 <봄꿈>을 펴낸 고정순 작가를 지난 16일 서울 마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수빈 기자

1980년 광주에서 아버지 영정을 들고 있던 다섯살 조천호군에게 동화작가 권정생이 쓴 편지를 바탕으로 그림책 <봄꿈>을 펴낸 고정순 작가를 지난 16일 서울 마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수빈 기자

“처음엔 쓰기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5·18 사건 개요를 말할 수는 있어도 자세히 들어가면 잔인하고도 처참한 일들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5·18이 직접 거론되지 않으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가정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생각하며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 책이 5·18 전부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이걸 계기로 아이들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다른 책을 읽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랐어요.”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그림책은 많지 않다. 권윤덕의 <씩스틴>, 서진선의 <오늘은 5월 18일> 등이 있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잔인한 역사를 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봄꿈>은 1980년 광주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다섯 살 아이가 일상 속에서 아빠와 평범한 행복을 쌓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아빠와 숨바꼭질을 하고, 해변가에서 놀고, 아빠 등에 업히는 평범한 이야기. “오늘도 내일도 아빠랑 놀 때가 제일 좋아”라고 말하던 아이는 봄이 오면 아빠가 좋아하는 꽃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하지만 대신 장례식장에서 아빠의 영정을 들고 덩그라니 앉아있다. 영정 사진 속 아빠를 닮아 눈매가 둥근 아이가.

고정순은 “5·18에 관한 이야기면서도 5·18이 나오지 않는 책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사건을 직접 거론하면 너무 큰 이야기로 다가온다”며 “한 개인의 행복이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이야기라면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책은 아빠와의 가장 행복했던 추억을 그리지만 정작 조씨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다. 너무 일찍 아버지를 여읜 탓이다.

“아버지가 목수였던 것과, 자전거를 태워준 것, 폭포에 놀러갔는데 자신이 무서워하자 ‘무섭지 않다’며 손을 대신 뻗어준 것이 기억난다고 했어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아버지를 찾아 시신 사이를 헤멘 날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너무 배고프고 졸렸던 기억만 난다고 했어요. 누군가 건네준 사과를 먹은 기억이 난다고.”

그림책 <봄꿈>의 한 장면. 길벗어린이 제공

그림책 <봄꿈>의 한 장면. 길벗어린이 제공

그림책 <봄꿈>의 한 장면.

그림책 <봄꿈>의 한 장면.

현실을 사는 조씨에겐 아버지 없이 자라면서 겪어야했던 가난과 외로움, 고통이 더 컸다.

“사춘기때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다고 했어요.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도우러 나간 길에 돌아오지 못한 것이었는데 ‘좀 참고 살지…살아계셨더라면 좋았을텐데…’하는 원망이 들었던 것이죠.”

조씨의 사진이 공개돼 ‘꼬마 상주’로 유명해지자 언론의 관심도 쏠렸다. 학창시절 수업 도중 교실 밖으로 불려나가 인터뷰를 해야했던 조씨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그리움 대신 원망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현재 조씨는 광주광역시청에서 5·18 묘역관리와 함께 5·18 기록관에서 가이드를 하며 지낸다. 기록관을 한 바퀴 돌다보면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있는 어린 시절 자신을 마주한다. 사진 속 아이는 둥근 눈매를 그대로 간직한 채 어른이 되어 5·18의 진실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해 9월 광주광역시청에서 고정순 작가(왼쪽)가 <봄꿈> 출간을 위해 조천호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조씨는 “아직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를 대신해서 전해달라”고 전했다. 길벗어린이 제공

지난해 9월 광주광역시청에서 고정순 작가(왼쪽)가 <봄꿈> 출간을 위해 조천호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조씨는 “아직 아이들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를 대신해서 전해달라”고 전했다. 길벗어린이 제공

고정순은 그림책이 나오자마자 조씨에게 부쳤다. 조씨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이제 이 책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조씨의 두 아들은 이제 중학생과 초등학생이 됐다. 조씨의 이야기는 고정순의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두 아들에게 전해졌다. 조씨는 ‘아이들에게 보여주긴 했는데, 별 말이 없었다’고 반응을 전했다. 어떤 종류의 공감은 말이 아닌 ‘침묵’으로 더 잘 전달되기도 할 것이다.

17일 경북 안동의 권정생 동화마을에선 권정생 작가의 15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에선 권정생의 편지를 담은 그림책 <봄꿈>이 헌정됐다. 늦었지만, 권정생의 편지는 조씨와 두 아들에게,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가닿았다.

“천호야/ 정말 우리는 몰랐다고 말해도 될까/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른채…그 긴 세월 8년 동안을…그러나 천호야/ 지금 이렇게 늦었지만/ 넌달래꽃 한 다발 꺾어/ 너의 가슴에 안겨주면서 약속할게…다시는 피흘리는 일 없이 살아갈 것을”(‘경상도 아이 보리문둥이가…광주의 조천호군에게’)

동화작가 권정생이 1988년 조천호군이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찍은 사진을 보고 뒤늦게 쓴 편지 ‘경상도 아이 보리문둥이가…광주의 조천호군에게’ 전문. 길벗어린이 제공

동화작가 권정생이 1988년 조천호군이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찍은 사진을 보고 뒤늦게 쓴 편지 ‘경상도 아이 보리문둥이가…광주의 조천호군에게’ 전문. 길벗어린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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