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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된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가 25일(현지시간) 프랑스 칸 미라마르 극장에서 상영됐다.

상영 중 객석 곳곳에서 관객들이 훌쩍였다. 한국 사람도 잘 알지 못하던, 콜센터에서 일한 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의 이야기가 전 세계 관객의 마음에 가닿은 듯했다. 상영이 끝나고 불이 켜지고 나서도 긴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이날 프랑스 칸에 설치된 영화진흥위원회 부스에서 만난 정 감독은 “되게 한국적인 이야기고 상황이다. 심지어는 저도 잘 몰랐던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이라 칸에 모인 관객들이 공감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며 “(뜨거운 반응에) 너무 놀랐다. ‘어린 아이가 겪어가는 힘듦과 착취가 그들도 이해가 됐나보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 소희>는 2017년 벌어졌던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다. 전주 LG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상담사로 일하던 특성화고 현장실습생(18)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 감독은 이 현장실습생을 소희(김시은)라는 당차고 성실한 캐릭터로 만들어냈다. 정 감독은 “시사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이 사건을 처음 접했다. ‘왜 콜센터를 고등학생이 가지’하고 의아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봤다. 알수록 기가 막혔다”며 “당시의 상황은 취재를 바탕으로 사실적인 것들로 채우려고 했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모르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찾아보면 자료가 너무나 많았다. 업체 측의 실시간 실적 압박과 감시, 소희가 항상 차고 있는 이름표, 특성화고의 열악한 상황 등 모두 실제 요소들”이라고 말했다.

📌“특성화고 현장 실습생 죽음의 노동 개선하라”

📌현장실습 특성화고 여고생 사망 놓고 책임 공방

다만 유가족이나 당사자를 만나진 않았다. 정 감독은 소희의 주변인을 모두 바쁘고, 나름의 상황이 있는 인물들로 그렸다. “부모님도 그렇지만 다른 인물들도 나쁘게만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인물들 모두 나름의 처지와 곤궁함이 있다. 그 속에서 조금씩 외면당하고 소외되면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싶다”고 했다. 극 중 부모는 소희가 힘든 줄도 모를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 같은 학교 선배인 남자친구는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한 뒤 물류센터로 쫓겨나 택배를 나르느라 정신이 없다. 친구는 갑자기 당일에 시간이 바뀐 면접을 보러가고, 또 다른 친구는 다음날 새벽 공장에 나가야 해서 일찍 들어가 봐야 한다. 소희는 혼자 남는다. 소희의 사건을 추적하던 형사 유진(배두나)은 소희의 친구에게 “그날 네가 없어서 소희가 그렇게 된 건 아닐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특성화고 애견학과에 다니던 소희(김시은)는 대기업 하청업체 콜센터에 취직한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치고 생기있는 소희는 점점 표정이 없어진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키이스트 제공.

특성화고 애견학과에 다니던 소희(김시은)는 대기업 하청업체 콜센터에 취직한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치고 생기있는 소희는 점점 표정이 없어진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키이스트 제공.

학생이 죽었는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 대해 형사 유진은 울분을 터뜨린다. 학교, 회사, 교육청에 찾아가 주먹을 날리고, 소리를 지른다. 타살 정황이 전혀 없는 사건을 윗선의 압박을 받으면서까지 너무 열심히 수사한다. 대사는 다소 설명적으로 느껴진다. 정 감독은 “마지막까지 직접적이고 설명적인 부분을 최대한 덜어내려 했지만 반드시 해야 할 말과 들어야 할 말이 있었다”며 “유진이라는 인물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 인물이 존재하는 게 작은 희망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앞으로도 비슷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겠지만 그런 인물이 어딘가에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괜찮은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형사 유진(배두나)은 소희의 사건을 추적하며 책임자들을 차례로 만난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키이스트 제공.

형사 유진(배두나)은 소희의 사건을 추적하며 책임자들을 차례로 만난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키이스트 제공.

영화는 소희를 비롯한 또래 여성의 얼굴을 계속해서 비춘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현장실습생 동료들은 물론이고, 토하면서도 먹방을 하는 BJ, 데뷔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하 연습실에서 계속 춤을 추는 아이돌 연습생, 백화점 주차장 앞에서 안내를 하며 인사하는 노동자까지 모두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정 감독이 소희라는 이름을 따왔다는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 ‘손톱’에도 어린 여성 노동자가 나온다. 스물한 살 소희는 우연히 좋은 물건을 손에 넣으면 중고 사이트에 팔고, 짬뽕을 먹으려다 라면을 끓인다.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만두면 되지’. 영화는 그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간극을 보여준다. 소희는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남자친구에게 “그만두라”고 말하던 자신을 후회한다. 이 장면은 이후 소희가 다니던 원청회사의 직원이 “일을 관두면 되지 왜 죽냐”고 말하는 것과 대비된다.

정주리 감독. 트윈플러스파트너스·키이스트 제공.

정주리 감독. 트윈플러스파트너스·키이스트 제공.

정 감독은 김훈 작가의 <라면을 끓이며>에 나오는 말을 인용했다. “인간에게 다른 인간이 다가오지 않으면 고립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김 작가는 불구덩이 속에 고립된 소방관의 상황을 이같이 표현했다. 정 감독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많은 분들의 처지도 비슷한 것 같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연기와 불길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아 그 사람이 거기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있다”며 “그가 거기 갇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어야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누군가는 소희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음 소희>의 국내 개봉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


칸|오경민 기자 5k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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