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보통의 남성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Men, 당신은 다르다고 믿는가. 앨릭스 갈런드 감독

오경민 기자

낯선 공간에 온 한 여성, ‘금기’깨지 않았는데

여러 남자들로부터 반복해 ‘미친’ 일들 겪어

영화 본 남성 관객들 ‘나도…’ 솔직한 인식 갖길

호러 영화 <멘>에서 주인공 하퍼 역을 맡은 제시 버클리는 공포영화가 여성 배우를 약자나 희생자로 재현하는 것을 경계해 이전의 공포 영화 캐스팅 제의를 거절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 캐스팅에 응하면서 “호러를 싫어하지만 이 영화는 달랐다. 이 영화는 악몽이자 동화”라고 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사진 크게보기

호러 영화 <멘>에서 주인공 하퍼 역을 맡은 제시 버클리는 공포영화가 여성 배우를 약자나 희생자로 재현하는 것을 경계해 이전의 공포 영화 캐스팅 제의를 거절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영화 캐스팅에 응하면서 “호러를 싫어하지만 이 영화는 달랐다. 이 영화는 악몽이자 동화”라고 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영화 <멘(Men)>은 공포영화의 관습을 깬다. 주인공이 낯선 공간에 당도하는 것 정도가 유일한 클리셰다. 주인공은 금기를 깨지 않지만 재난은 닥친다. 공포에 떠는 무능력한 여성 주인공도 없다. 전형적인 공포영화라면 초자연적 존재가 점점 강해지고 주인공이 공포에 압도당하며 절정을 맞이해야겠지만, 이 영화의 절정에서 괴물은 약해지고 주인공은 침착하다. 앨릭스 갈런드 감독은 공포영화의 공식을 뒤집으면서 ‘유해한 남성성’에 대한 반성문을 써냈다.

남편을 잃은 하퍼(제시 버클리)는 한 시골 마을의 저택을 빌려 휴양한다. 산책하다 아름다운 동굴을 발견한다. 메아리로 자신만의 멜로디를 만들다 벌거벗은 남자를 마주친다. 이 남자는 하퍼를 집까지 쫓아와 근처를 배회한다. 하퍼는 이후 이 마을에 사는 여러 남성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보통 공포영화에서 주인공은 하지 말라는 걸 합니다. 어두운 데 가지 마라, 무덤가에 가지 마라, 마녀를 화나게 하지 마라, 문서를 보지 마라…그런데 이 영화에는 금기가 전혀 없습니다. 저는 ‘하지 말라는 걸 해서 끔찍한 일이 생긴다’는 걸 반박하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여성이 (동굴에서)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힐링을 하죠. 잘못한 게 없는데 갑자기 ‘미친’ 일들을 겪습니다. 당연히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13일 화상으로 만난 갈런드 감독은 말했다.

마을의 남자들은 하퍼를 쫓아오거나 집에 침입하려 하는 등의 직접적인 괴롭힘을 행사하기도 하고, 남편을 잃은 하퍼를 굳이 ‘말러 부인(미세스 말러·말러는 죽은 남편의 성)’이라고 부르며 신경을 긁기도 한다. 갈런드 감독은 “각각의 캐릭터는 흔히 볼 수 있는 남성 성격의 전형(Archetype)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며 “이들에 대한 영감은 일상에서 얻었다. 남성 간 대화를 하면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비명을 지르지 않아도 느껴지는 공포, 불쾌감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성들의 유해성을 과장하거나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실제보다 너무 부드럽게 표현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영화를 만든 뒤 15세 딸에게서 지하철을 탔는데 누군가 촬영을 하려 하고 만지려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순간 내 영화의 수위가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이 강간당하지 않지만, 현실에서 강간은 일어납니다. 만약 이런 현실을 조금이라도 과장했다면, 제 영화는 아예 보기가 불가능할 겁니다.”

남편을 잃은 트라우마에 빠져 있는 하퍼(제시 버클리)는 휴양 온 시골에서 아름다운 동굴을 발견한다. 이곳에서 자신만의 멜로디를 만들다 벌거벗은 의문의 남성을 마주치고, 그때부터 재앙은 시작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남편을 잃은 트라우마에 빠져 있는 하퍼(제시 버클리)는 휴양 온 시골에서 아름다운 동굴을 발견한다. 이곳에서 자신만의 멜로디를 만들다 벌거벗은 의문의 남성을 마주치고, 그때부터 재앙은 시작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하퍼(제시 버클리)에게 저택을 빌려준 제프리(로리 키니어)는 이 마을의 유해한 남성 중엔 얌전한 편에 속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하퍼(제시 버클리)에게 저택을 빌려준 제프리(로리 키니어)는 이 마을의 유해한 남성 중엔 얌전한 편에 속한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하퍼의 숙소에 들어오려고 하는 의문의 남성, 이 남성을 체포하고도 ‘위험한 것 같지 않다’며 풀어주는 경찰, 뜬금없이 숨바꼭질하자고 했다가 하퍼가 거절하자 여성혐오적 욕설을 뱉는 소년 등 이 마을의 남성은 모두 로리 키니어라는 배우 한 명이 연기한다. 남성들이 서로 연결돼 있으며, 서로에게 남성성을 대물림하고 있다는 상징이 영화에서 반복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면은 마지막 10분이다. 마을의 남성들은 서로를 (말 그대로) 잉태하고 낳는다. 갈런드 감독은 “전형적인 남성의 성향, 남성의 행동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 그것을 전승하고, 재생산하고, 복제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민들레 홀씨’도 전파되고 재생산되는 ‘남성성’을 빗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감독은 이 ‘해로운 남성들’을 ‘보통의 남성들’ 혹은 자신과 분리하지 않았다. 그는 “(‘미투’로 몰락한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악마 같은 강간범’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그가 했던 행동의 수위를 조금씩 낮추면 ‘나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네’ 하는 순간들이 있다”고 말했다. 로리 키니어를 캐스팅한 데에도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보통의 남성처럼 보인다는 점이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감독은 다만 이 영화는 남성들을 향한 강의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탐구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성들을 가르치려고 만든 게 아니라, 저에 대한 개인적인 영화”라면서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공포를 추구한다. 이 영화를 만들며 스스로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오랫동안 내 안에 자리 잡은 관습, 내가 생각하는 방식 같은 것들에 대해서”라고 했다.

“화가 났을 때 때리거나 싸워도 된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분노하면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하나의 문장이 내 안에 있어요. 남성 관객에게 굳이 무언가를 전한다면, ‘나도 이럴 수 있구나’하고 받아들이는 솔직한 인식을 가졌으면 한다는 겁니다.”

<멘>은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알렉스 가랜드 감독.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제공.


Today`s HOT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황폐해진 칸 유니스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개전 200일, 침묵시위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