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부산 이바구

김창길 기자
ⓒ박종우,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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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들은 몰랐단다. 자기네 동네 목욕탕 굴뚝의 기묘한 생김새를. 소년의 눈에 부산의 목욕탕 굴뚝은 유난히도 높고 거대했다. 방학이면 부산 영도의 이모네 집을 찾았던 서울내기 소년이다. 부산역에 도착한 소년을 반기는 것은 하늘 높이 치솟은 목욕탕 굴뚝이었다. 소년은 예상했을까? 자기가 나중에 한국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스트가 되어 부산을 사진으로 기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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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들에게 부산은 어떤 도시일까?’

부산 해운대구에서 사진미술관을 운영하는 고은문화재단이 던진 질문이다. 답변하는 이는 부산이 고향이 아닌 중견 사진작가들이다. 2013년에 질문을 시작했는데 1년에 한 번꼴이었다. 질문지에 ‘부산 참견錄(록)’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2019년에는 이름을 ‘부산 프로젝트’로 바꾸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2년 동안의 휴지기를 끝낸 이는 환갑을 넘긴 작가 박종우다. 차마고도의 아름다움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정통파 다큐멘터리스트다. 박종우의 부산 다큐멘터리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 그보다 앞선 이들의 부산 프로젝트를 개괄하는 일이 필요하다. 왜냐고? 박 작가 역시 그러했으므로.

2013년 부산 프로젝트의 테이프를 끊은 작가는 전남 신안의 작은 섬이 고향인 강홍구였다. 서울 은평뉴타운 재개발 현장을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찍었던 강 작가는 산복(山腹)의 기이한 집들을 모은 <사람의 집 - 프로세믹스 부산>을 남겨놓았다. 원자력발전소를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정주하 작가는 해운대와 고리 원전을 잇는 장소들을 사진 찍었다. 정 작가의 <모래 아이스크림>(2017)은 원자력발전이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지만 언제라도 쉽게 부서질 모래성 같은 것이라고 경고한다. 2019년 조춘만 작가는 부산의 공장, 산업 구조물, 기계 등을 찍은 <인더스트리 부산>을 전시했다. 기계 따위를 찍어서 어떻게 미술관 벽에 걸어놓을 수가 있냐고?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말했다.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조 작가는 우리가 사는 도시도 일종의 기계임을 사진으로 풀어냈다.

ⓒ박종우,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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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우의 2022년 부산 프로젝트 <부산 이바구>는 어떤 이야기일까? ‘이바구’는 ‘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 박종우 작가는 ‘58년 개띠’다. 6·25전쟁을 겪지 않은 베이비붐 세대의 대표 주자. 부모와 조부모가 겪은 저마다의 전쟁 고생담을 반복해 들으며 성장했을 터다. 작가의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서울에서 살았다. 수색대장이었던 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에 나서며 할머니와 헤어졌다. 중공군이 참전하자 아버지의 소식이 끊겼다. 할머니는 피란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갈 곳 없는 홀몸의 피란민을 받아준 것은 좌천동의 작은 절 연등사였다. 1951년 따뜻한 봄날이었다고 할머니는 기억했다. 장소는 부산 수정동의 구멍가게였다. 생사를 몰랐던 아버지를 만났다. 황해도에서 총상을 입은 아버지가 수정동의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됐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작가가 들었던 할머니의 부산 이바구이다. 소년 박종우의 부산 이바구는 애처롭게도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할머니는 연등사에 남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경남 진해에 살던 아버지와 소년은 할머니의 유골을 들고 부산으로 향했다. 운구차는 낙동강 구포다리를 건넜다. 크고 작은 산이 많이도 보였다. 작은 집들이 산비탈에 가득했다. 비포장도로는 산허리를 감싸고 돌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부산은 여전히 할머니가 들려준 임시수도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의 사별 여행에 대한 기억을 소환했던 박종우 작가의 부산 이바구는 구포다리에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다리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다. 구포다리만 그렇겠는가? 다릿목에 번성했던 시장은 ‘구포시장’이라는 이름만 그대로였다. 할머니가 들려주던, 그리고 할머니와의 사별 여행에서 보았던 부산의 모습을 기대했던 것은 부질없는 짓일까? 박 작가는 물러서지 않는 작가인 듯하다. 그의 사진 철학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진은 머리로 찍는 것이 아니다. 부둣가, 시장, 해운대 기찻길, 방파제, 골목길…. 박종우는 소년 시절의 부산에 대한 지도를 그리려 스틸 로드뷰를 찍어 나갔다.

ⓒ박종우,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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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까꼬막에서 그리운 할머니를 만난다. ‘까꼬막’은 급경사진 산비탈을 뜻하는 부산 사투리. 배 ‘복(腹)’ 자를 쓰는 ‘산복’도 같은 뜻이다. 산비탈에 들어선 집들은 그래서 어머니 품에 안긴 모양새다. 비탈에 집을 지으려면 산을 깎거나 축석을 쌓아 평지를 만들어야 한다. 흙이라면 다행인데 암석이라도 나온다면 지형에 맞게 집을 지을 수밖에. 어떤 집들이 기우뚱해 보이는 이유다. 건축 자재가 부족했는지 이질적인 재료가 뒤섞인 집들도 있다. 시멘트 미장이 덜 된 할머니의 집이 그렇다. 파마 중인 할머니는 집으로 들어가며 바다를 바라본다. 매일 봤던 풍경일 텐데, 새삼스레 다시 보는 건 어떤 이유일까? 사진 속 할머니가 소년의 할머니라면, 할머니는 바다 저편에 있을 고향을 보고 있을 거다.

ⓒ박종우,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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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꼬막에 발붙이고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이 있다. 소년은 똬리를 틀고 있는 계단들과 지붕 위 물탱크를 꼼꼼히 뜯어본다. 산비탈의 기울기가 다르니 계단 모양새가 제각각인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왜 계단에 페인트를 칠했을까? 집들은 계단보다 더 화려하다. 벽화야 다른 도시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까꼬막 집들의 알록달록한 컬러는 독보적인 부산의 풍경이다. 예쁘니까 젊은이들이 찾아와 집들을 배경 삼아 사진 찍는다. 하지만 우리는 짙은 화장 뒤에 숨겨진 사연을 알아야 한다. 소년은 그래서 지붕 위의 파란 물탱크를 사진 찍어 모았다. 수압이 세지 못한 까꼬막에서 살기 위해서는 물이 잘 나올 때 저장해 놓아야만 했다. 물론 지금은 물 사정이 나쁘지 않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물탱크 철거 비용을 쓸 여력이 없어 그대로 방치된 풍경이 소년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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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 광장에서 소년이 바라보곤 했던 목욕탕 굴뚝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굴뚝은 너무 견고하고 거대해 철거 비용이 3000만원이 든단다. 벽돌이 아닌 철근콘크리트로 세운 굴뚝들이다. 30m는 기본, 50m가 넘는 것도 있다. 이방인들은 궁금할 것이다. 왜 이토록 높은 굴뚝을 만들었을까? 그 이유가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옛날 목욕탕은 물을 데우기 위해 값싼 벙커C유를 사용했다. 매연이 많이 나오는 연료다. 목욕탕 주인들은 그래서 굴뚝을 높이 올렸다. 동네 사람들 건강을 위한다는 게 그 이유였던 것이다.

ⓒ박종우,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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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하늘을 지배했던 목욕탕 굴뚝의 위세는 꺾였다. 수영구 광안동의 목욕탕인 미주탕 굴뚝은 고층 아파트 주민들의 건강을 생각하기에는 더 이상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물론 연료가 바뀌었으니 굴뚝 높이가 이제 문제가 될 수는 없겠다. 소년은 다만 비슷한 페인트 붓글씨로 굴뚝 허리에 적힌 목욕탕 이름들을 생각해본다. 청수탕, 산수탕, 옥수탕, 약수탕, 샘물탕, 성수탕, 장수탕, 건강탕…. 목욕탕 본연의 기능에 걸맞은 이름들이다. <천일의 수도, 부산>을 쓴 전라도 작가 김동현은 한국의 공중목욕탕이 부산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동래구의 동네 이름이 ‘온천동’인 것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부산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부산 주택가에는 작은 시장이 무척이나 많다. 소년은 생각했다. 쓸모를 잃은 목욕탕 굴뚝이나 물탱크처럼 작은 시장들도 곧 애물단지가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소년의 마음이 다급해진다. 소년은 거리 구석구석을 누비며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소주 한 잔을 들이켜는 배불뚝이 아저씨, ‘서울대 행정학과 합격 박지은’이라는 축하문이 적힌 리어카에서 옥수수와 군밤을 파는 어머니, 수산물 시장에서 쟁반을 머리 위에 지고 식사를 배달하는 아주머니, 예쁜 눈썹 화장을 하고 싱긋 웃고 있는 돼지머리, 3000원짜리 정구지(부추)전을 공중 부양시켜 뒤집는 묘기를 선보이는 아낙네, 재난위험시설 판정을 받은 아파트의 주민들…. 글로 묘사하기는 쉽지만 사진을 찍기는 어려운 장면들이다. 고난도의 사진술이 필요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낯선 사진가의 느닷없는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거리의 사진가는 불청객이다.

서울에서 사람들을 사진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좋은 의도로 접근한다 해도 도시인들은 얼굴을 붉히기 일쑤다. 그들은 초상권을 주장한다. SNS의 노예가 된 도시인들은 악플이 달릴 우려가 없는 예쁜 셀카 사진들만 찍고 구경한다. 그런데 소년은 어떻게 거리의 사람들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을까? 소년을 대신해 환갑이 넘은 박종우가 대답한다.

“구수한 사투리로 먼저 말을 건네오고 살아가는 얘기를 꺼내는 부산 시민들 덕분에 작업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고백은 거짓이다. 그가 한 말은 질문에 대한 답을 가장한 부산에 대한 헌사다. 박종우가 부산 사람들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부산에서 박종우는 잘나가는 사진작가도, 다큐멘터리스트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소년일 뿐이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이모에 얽힌 추억을 간직한 소년 말이다.

ⓒ박종우,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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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꼬막을 내려와 부산의 구석구석을 배회하던 소년은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 크고 깊고 너르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바다는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는 푸른 하늘만이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으르렁거린다. 두려울 것 없는 소년이 바다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맞선다. “처얼썩 처얼썩 척 튜르릉 꽉” 바다는 소년을 품에 안으며 말을 건넨다. 부산은 어떤 도시였냐고. 소년이 바다에게 대답한다. 서울이 아버지라면 부산은 어머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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