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대리임신·정자 판매···‘보상받는 자발적 참여’가 아니라 ‘임금을 받는 노동’이다

오경민 기자
<임상노동>

<임상노동>

임상노동

멜린다 쿠퍼·캐서린 월드비 지음, 한광희·박진희 옮김│갈무리│416쪽│2만3000원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대상자는 시험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자발적’으로 참여를 결정하는 서면 동의서를 작성한다. 제공사항은 ‘소정의 사례비’ 혹은 ‘일정 금액의 보상비’다. 예측 가능한 부작용도 안내받지만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도 고지받는다. 이런 임상시험에는 누가 참여할까.

호주국립대학의 멜린다 쿠퍼 사회학과 부교수와 캐서린 월드비 사회과학연구소장은 저서 <임상노동>을 통해 ‘가장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임상시험과 난자나 정자 판매와 같은 ‘보조생식노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뢰할 수 있는 장기기증에 참여하거나, 잘 규제되고 보장된 의료시스템의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일부 암 환자를 제외하고 말이다.

난자와 정자를 판매하는 것, 돈을 받고 아이를 임신·출산한 뒤 구매자에게 보내는 것은 불임 가정을 위한 서비스다. 실험적 약물이 세상에 판매되기 전 사람의 체내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살피고 부작용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수의 사람이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것은 제약 산업에 필요한 일이다.

두 명의 저자는 이렇게 보조생식에 기여하는 것과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것을 모두 ‘노동’으로 규정한다. 보조생식이나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이들이 지급받는 금전을 ‘임금’보다는 ‘보상’으로 규정하던, 이들의 참여를 ‘자발적 참여’ 혹은 ‘공익을 위한 기증’으로 규정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저자들은 ‘생명 혹은 생물학적인 것은 팔 수 없다’는 윤리적 주장 때문에 오히려 임상노동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이뤄지고 있다고 일갈한다. “ ‘생물학적인 것에 임금이 지급될 수 없다’는 윤리적 주장은 원시적 형태의 노동계약과 일관성 없는 보상이 수월하게 이뤄지도록 돕”고 “노동법이 규정하는 표준적 보호들로부터 면제되는 것을 정당화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책은 임상노동 역시 다른 노동과 마찬가지로 계급·인종·성별에 따라 계층화돼 있으며, 중심부를 위해 주변부를 착취하는 ‘희생경제’ 시스템 위에서 굴러가고 있다고 말한다. 전혀 다른 인구에게 아이를 선물하기 위해, 전혀 다른 인구를 위한 치료제 생산을 위해 가난한 이들이, 유색인종이, 여성이 자신의 몸을 희생해 예측 불가능한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노동’으로 간주되지도 않는다. 책은 이런 현상이 남성의 몫이던 공식적 노동, 생산에는 임금을 지급하고 여성의 몫이던 돌봄이나 비공식 노동에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성별 분업 체계의 양상과 연결된다고 말한다.

임상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위험한 시험 혹은 의료적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을 근거로 사용자들은 책임과 위험을 회피하고 있다고 책은 말한다. 자본이 노동자에게 ‘동의’를 받는 것은 과거 직장에서 발생하는 사고와 위험 부담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수단이었는데, 이런 방식이 임상노동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대리모 관련 법에는 ‘특정 이행’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대리모는 나중에 변심하여 아이를 보내기 싫더라도 무조건 아이를 보내야 한다. 다른 종류의 계약에서라면 채권자에게 금전적 손해배상만 해도 충분할 사항이지만 대리모 관련법은 ‘출산 시 아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조항으로 대리모의 아이에 대한 권리를 무조건 박탈하고 있다.

저자는 각종 논문과 연구를 인용해 임상노동시장의 실태를 드러내며, 임상시험 참여와 보조생식 참여를 ‘노동’으로 규정하고 불공정한 교환을 시정해야 한다고 빠르게 설득해 나간다. 대리모나 제약 회사를 위한 임상시험이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질까,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2005년 한국에서 일어난 황우석 스캔들은 우리가 임상노동을 개념화하는 데 큰 자극을 주었다. 황우석과 그의 연구실은 세계 최초로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주를 만들기 위해 121명의 여성으로부터 2000여개 이상의 난모세포(난자)를 구했다. …생명경제는 여성의 신체는 물론, 난모세포 자극과 회수라는 힘겨운 과정을 견디는 그들의 각오에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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