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비의 칼과 펜

‘정치적’이기에 특별한 인간…땅에 발 디딘 ‘동물’임도 잊지 말라읽음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18) 아리스토텔레스와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그려진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를 들고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땅을 가리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기 때문에 보다 젊게 그려져 있다. 바티칸 사도궁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그려진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를 들고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땅을 가리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기 때문에 보다 젊게 그려져 있다. 바티칸 사도궁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국가 속에서 인간의 정치적 본성이 완전히 발휘된다고 주장
‘먹고살기 위한’ 공동체와 엄밀히 구분

후대 이론가들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말한 것이라 곡해하기도
국가 테두리에서 올바른 삶을 강조했을 뿐 기본 욕구 무시 안 해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학의 역사에서 이보다 더 유명한 말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한 말이다. 이 무렵 그리스인들에게 ‘본성적’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갓난아기가 알려주지 않아도 배가 고프면 울음을 터뜨려 ‘젖 줘요’ 하고 신호를 주는 것은 본성에 따른 행동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기는 굶어 죽기 십상이다. 그래서 배고프면 울도록 아이에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적어도 갓난아기에게는 최선이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도 비슷하게 새길 수 있다. 이 말은 ‘인간은 가만 놔둬도 정치적으로 살아간다’ ‘인간은 정치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인간은 정치적으로 살아갈 때 가장 잘살게 되어 있다’의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사실 이런 생각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지난번 프로타고라스의 사상을 소개하면서(연재 10회) 그리스인들이 국가를 인간의 허약함과 취약함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인간은 이나 발톱이 날카로운 것도 아니고 힘이 고릴라만큼 세거나 빠르게 달릴 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땅을 파거나 위장색을 동원해 귀신같이 몸을 숨길 능력도 없다. 살 방법이라면 힘을 모으는 것이다. 그래서 사방에서 인간들은 뭉쳐 살아간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뭉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상식적 사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한 것이다.

■‘정치적’이라는 형용사의 의미

‘정치적’이라는 말이 일차적으로 ‘뭉쳐 산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독자들이 꽤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이라는 말에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이런 식의 주장을 편 학자들은 많다. 그 안에는 귀 기울일 이야기도 적지 않지만 무리한 주장도 섞여 있다. 대개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불충분하거나 편파적으로 읽어서 생기는 오해이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적’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에 대한 힌트는 그의 저작 곳곳에 있다. 그중 하나가 <동물학>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을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모여 사는 동물, 다른 하나는 혼자 사는 동물이다. 모여 사는 동물을 다시 그는 둘로 나눈다. 하나는 집단을 이루기는 해도 어떤 목표를 위해 힘을 합하지 않는 동물들이다. 이런 동물들이 이루는 집단은 각자도생하는 개체들의 산술적 합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함께 일정한 목적을 위해 힘을 합하는 동물들이다. 여기에는 인간, 벌, 두꺼비, 개미, 학 등이 속한다. 이런 후자의 동물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름 아닌 ‘정치적’이라고 부른다.

이런 정치적 동물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두머리에 복종하며 사는 경우도 있고 그런 지배관계 없이 각자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모든 동물이 칼같이 한 부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이면서 어떤 면에서는 집단과 거리를 두며 독자적 삶을 살아가는 동물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이 바로 그렇다. 인간이 전체를 염두에 두고 협동하지만 더불어 간섭받기 싫어하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는 성향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인간이 벌이나 개미보다 덜 정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뭉치지 않으면 워낙 비실비실해서 신이나 초인이 아닌 바에야 정치적으로 살지 않을 방법이 없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적’이라는 말은 ‘각자 알아서’라는 말의 반대말이다. 물론 모든 군집이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벌이 두 마리가 모일 수도 있고 열 마리가 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벌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군집은 여왕벌을 중심으로 집단을 이룰 때 완성된다. 그 안에서야 비로소 벌의 정치적 본성이 100% 발휘된다. 그리고 그런 집단은 ‘정치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개미가 100마리 있을 수도 있고 1000마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미의 군집 형태는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분업체계를 만들 때 완성된다. 그리고 그런 군집을 이룰 때에야 개미의 정치적 본성이 완전히 드러난다. 그런 집단은 정치적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인간의 군집이 단순한 형태에서 완성으로 나아가는가를 추적한다. 최초에는 가족이 있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여 집성촌처럼 혈족관계로 이어진 마을공동체를 이룬다. 당장 이 단계에서도 인간의 삶은 단지 하루하루 먹고 살아남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는 수준은 벗어난다. 보다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누릴 기회가 열린다는 의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국가는 이런 발전의 마지막 단계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단지 살아남는 것을 넘어 ‘잘’ 살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잘’ 산다는 말은 뭔가 부족하여 남에게 손 벌리거나 죽이지 않고 지킬 것을 지키며 어깨 펴고 산다는 뜻이다. 바로 이 단계에서 인간의 정치적 본성이 완전히 발휘된다. 즉 국가 속에서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이런 국가공동체를 우리는 ‘정치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와 그 이전의 공동체, 즉 가족이나 마을공동체를 혼동하는 것을 큰 잘못으로 여겼다. 국가가 아무리 작아지고 가족이 아무리 커져도 둘은 같을 수 없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조 상무(조우진)가 안상구(이병헌)를 묶어 놓고 린치를 가하며 “사장 사장 해주니께네 다 똑같은 사장으로 보이요? 사이즈가 다르잖아!”라고 비웃듯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국가나 다른 공동체나 결국 그게 그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공동체 공동체 해주니께네 다 똑같은 공동체로 보이요?”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가 가족이나 마을공동체와 다르다고 본 이유는 사이즈가 달라서가 아니라 질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의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국가를 다른 공동체와 구분한 것을 두고 여러 논쟁이 벌어졌다. 많은 정치이론가들은 현대인들이 정치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잃어버린 채 표류에 표류를 거듭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경제적 성장, 생산성 향상, 부의 창출 등이 마치 국가의 유일무이한 목표처럼 여겨져 민주주의적 권리보장이나 평등, 사회 성원 간의 연대와 같은 중요한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를 가족이나 마을공동체와 질적으로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다시금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펴는 이론가들이 종종 정치에 대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주관적 기대나 이상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무리하게 투사한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사실은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는 셈이다. 주장을 펴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리고 심지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 사상가를 두고 소설을 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20세기 정치사상의 스타 중 하나인 한나 아렌트가 그런 경우이다(연재 3회). 아렌트는 오늘날 정치가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경제적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면서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얼마나 정치를 다르게 이해했는가를 설명했다. 그리스에서 정치는 개인의 탁월성을 실현하고 인정받는 장이었으며 먹고사는 문제를 그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은 금기시되었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다. 아렌트가 남긴 유고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주장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주장은 멋져 보일지는 몰라도 아주 단순한 문제조차 명쾌하게 답하지 못한다. 만일 먹고사는 문제를 정치와 그렇게 분리시킨다면 청년 일자리, 노인 복지, 경제소외계층에 대한 지원, 의료보험료의 차등부과, 국민연금제도 개선 등, 쉽게 말해 복지제도 전반의 문제도 정치의 문제 밖에 놓이게 되지 않을까?

이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정치문제와 경제문제의 깨끗하고 완전한 분리는 기원전 8세기 이후의 어느 그리스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해 당시 그리스 폴리스의 발전 수준에서 가능한 일 자체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의미에서 가족이나 마을공동체를 국가와 구분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하였다. 아렌트가 말하는 식의 정치와 경제의 분리는 아리스토텔레스로서는 전혀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나 그보다 앞 혹은 뒤의 문필가들을 내세워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정치를 다르게 이해했어요. 거기에 비교하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잘못하고 있어요”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은 19세기 말 유럽, 특히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여기에는 다양한 우파 자유주의자들도 포함된다)이다. 이들은 당시 사회주의 정파들을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이해를 실현하려는 운동쯤으로 격하하며 이들이 정치를 경제적 이해를 관철하는 도구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정치는 너희들 임금이나 생활수준을 따지고 복지를 위한 정부보조금 따위에 핏대 세우는 그런 곳이 아니야’라는 것이 이들의 논조였다.

그들은 비슷한 어조로 자유주의 정파들도 비난했다. 이 무렵 꽤 이름 있다고 하는 독일 사상가의 입에서 자유주의는 돈과 이익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영국식 자본주의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이며, 정치를 경제의 하인 정도로 만들려는 협잡질일 뿐이라는 식의 비난을 듣는 것은 흔했다. 보수주의 지식인들(나중에는 좌파 지식인도 가세했다)은 먹고사는 것, 돈과 이익에 매달리는 일상의 비루함으로부터 정치를 구출하여 개인의 우월함과 이상을 드러내는 고결하고 숭고한 행위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고전 사상가였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안에서 자신들이 신봉하는 정치관의 뿌리를 찾아내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개념에 대한 (상상력은 풍부하지만 역사와 문헌학의 입장에서는 빈약한) 온갖 해석들이 쏟아졌다. 아렌트는 이런 전통의 끝에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그리스인들이 정치적 삶과 생물학적 삶을 아예 분리하여 심지어 다른 용어로 불렀다는 조르조 아감벤의 ‘보다’ 소설 같은 주장에 도달한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이 특별한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그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언어와 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함께 의사소통하면서 옳음과 그름을 정해 공동체를 꾸려간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가 속에서 인간들에게는 그저 살아가는 것을 넘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아주 중요해진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이 아무리 특별하다고 해도 결국 인간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생물의 일부였다. 삶의 유지에 필요한 기본적 욕구를 무시하고 오로지 뛰어난 개인의 가치와 이상이 경쟁하는 장으로서 정치공동체를 꾸릴 만큼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서설이 길었다. 그만큼 그의 사상이 서구정치철학사에서 갖고 있는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워낙 설이 분분한 사상가인 만큼 어디서 이야기를 시작할지 땅을 고를 필요도 있었다. 다음 글부터는 그의 시대와 삶에서 출발하여 그의 사상의 맥을 짚으려 한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윤비의 칼과 펜] ‘정치적’이기에 특별한 인간…땅에 발 디딘 ‘동물’임도 잊지 말라

정치이론을 역사 및 문화와 관련지어 연구한다.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과 및 역사학과,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을 강의하였다. 가르친다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산다. 2021년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독일에서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2018~2020년 한겨레 신문에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를 연재하였고, EBS <지식의 기쁨> <세바시> 등에서 강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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