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참사·불안…시대의 문제를 관통한 감정들

심사위원 김행숙·이경수·송경동·황인숙(가나다순)

심사평

지난달 9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2023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김행숙, 황인숙, 이경수, 송경동 심사위원(왼쪽부터)이 심사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지난달 9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2023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김행숙, 황인숙, 이경수, 송경동 심사위원(왼쪽부터)이 심사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가파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시의 무력함을 실감하곤 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무용하고 무력한 자리를 지켜온 까닭에 존재의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시가 절실하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을 통과하며 우리의 존엄도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 부문 응모작들을 천천히 읽었다. 이따금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섬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응모작들이 내뿜는 열기 속에서 모종의 감정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의 문제, 재난과 참사에 대한 애도의 문제, 청년세대의 불안, 가상세계에 대한 감각 등을 그린 시가 비교적 자주 눈에 띄었다.

응모작 중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한 네 명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읽는 시간을 가졌다. 토론의 장에 올라온 시는 사이의 ‘매트릭스(Matrix)’ 외 4편, 한백양의 ‘피카레스크’ 외 4편, 이자연의 ‘물과 풀과 건축의 시’ 외 4편, 박선민의 ‘버터’ 외 4편이었다. 저마다 다른 매력을 드러내며 단단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들이었다. 사이의 시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에 신뢰가 가고 무심한 세계에 상처 입은 주체가 던지는 발화가 매력적이었지만 아포리즘을 조금 줄여본다면 어딘지 익숙한 느낌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백양의 시는 사람들 속에서 상처받으며 살아온 시적 주체가 포착하는 세계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 취하는 주체의 태도를 담담히 말하는 시선이 눈길을 끌었지만 자기 고백적인 말이 흘러넘치는 시들은 여백이 필요해 보였다. 이자연의 시는 나무와 풀과 건축과 물을 오가는 상상력이 흥미롭고 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낯선 감각도 매혹적이었지만 참신한 비유의 매력을 상쇄하는 평이한 비유가 눈에 띄어 아쉬움이 남았다.

박선민의 ‘버터’는 뭉쳐지고 흩어짐, 얼음과 불, 저온과 고온의 대비적 상상력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사각이었다가 물처럼 녹아버리는 버터의 속성을 포착해 펭귄, 오두막, 당나귀, 저울, 안녕, 창문으로 이어지는 낯선 상상력을 전개해 나가는 힘이 인상적이었다. 버터에서 출발해 종횡무진 경계를 가로지르는 상상력의 바탕에는 버터가 탄소발자국이 많은 음식이라는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시적 상상력으로 풀어낼 줄 아는 감각이 돋보였다. 다섯 편의 시가 고른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점도 믿음이 갔다. 말을 예민하게 다룰 줄 알고 상상력의 전개가 독창적이면서도 이 시대의 가장 첨단의 문제의식을 관통하고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인류세로 접어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시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시대에 생태시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보여준 ‘버터’를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마음을 모았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또 하나의 빛나는 개성을 열어가기를 바란다. 예비 시인들에게도 쓰는 자로 살아가는 한 머잖아 우리는 지면에서 만날 거라고, 쓰는 시간이 우리를 버티게 할 거라고 응원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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