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하는 역사-쓰기, 미지의 ‘너’들에게로

강도희

문학평론 부문 | 강도희

그림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그림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그녀는 언어 속에 날아 들어가 언어를 날게 한다.” -엘렌 식수, ‘출구’1)

1. 기억을 돌보는 일

죽은 이의 삶을 기억하는 일은 언제나 위태롭다. 기록이나 기억에는 언제나 절단된 곳이 있다. 이를 채우고 꿰매는 역사가는 오랫동안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객관과 이성의 소유자로 여겨졌다. 18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죽음은 작은 무언가를, 기억을 남기며, 그에 대한 돌봄을 요구한다. 친구가 없는 이에게는 치안관이 돌봄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빨리 말라버리는 우리의 눈물보다, 빨리 잊혀버리는 우리의 그리움보다 법과 정의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이 치안관이 역사이다.”2)

그러나 법과 정의가 과연 눈물과 그리움보다 더 ‘안전하게’ 죽은 자들을 돌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난 몇십 년간 축적된 구술 연구와 증언 문학은 기억이 객관적인 사실을 복원해 보편적인 역사를 메우는 일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해왔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억하려는 역사가에게 새로이 요구되는 것은 빠트린 것이 없는지 샅샅이 살피는 무심한 치안관 역할보다도 죽은 이들과 서서히 관계를 형성하는 친밀함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문학 장에 ‘나’와 시·공간적으로 먼 인물들을 나의 지금-여기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자로 소환해내는 작품들이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가령 다른 시대와 문화 속 예술가들의 생애를 읽고 다시 쓰는 정지돈식의 역사소설이나, 현장 연구를 통해 알게 된 역사 속 인물에게 이입하는 한정현 소설의 연구자 인물들을 들 수 있다. 이들 소설의 화자는 우연히 마주친 기록들이 나의 현재와 떼어낼 수 없음을 깨닫는다. 기억은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고 체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경철학자인 모티머-샌딜랜즈는 어머니의 치매를 지켜보며 한 사람의 기억이 신체와 장소에 어떻게 저장되는지를 살핀다. 기억은 ‘내면’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몸, 마음, 장소 사이에서 복잡하게 형성된다.3) 그리하여 우리는 기억·추억·애도하기 위해 특정 공간에 가거나, 사진을 꺼내어 보거나, 글을 쓴다. 무정형의 기억을 물질적인(material) 것으로 바꾸어 나누는 작업은 한강과 정세랑의 최근 소설에서 기억을 돌보는, 모성적(maternal) 역사가들의 형상으로도 나타난다. 두 작가의 소설을 따라 읽으며 이 글은 우리가 낯선 풍경 안에서 익숙한 죽음들을 기억하는 방식들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4)

2. 처음부터 새로, 새를 지키는 마음으로

<소년이 온다>(2014)에서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학살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생존자들의 ‘그날’ 이후 삶을 다뤘다면, <작별하지 않는다>(2021)에서 한강 작가는 제주 4·3이라는 보다 더 먼 곳으로 나아간다. 멀다는 것은 단순히 1980년과 1948년, 광주와 제주의 차이가 아니다.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 <소년이 온다>는 작가가 1980년보다 조금 일찍 광주를 떠난 자신 대신 누군가가 죽었다는 느낌에서 쓴 작품이다.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소년’, 동호는 화자인 작가 ‘나’가 광주에 살 때 아버지가 직접 가르쳤던 학생이자 ‘나’의 가족이 떠나고 그들이 살았던 옛집으로 이사를 온다. 자신이었을 수도 있었던 초점 인물과의 동일시는 혼이 된 소년의 시점으로 쓰인 2장 ‘검은 숨’이나 작가가 소년의 무덤을 마주한 마지막 장면에서 특히 강하다.

5·18이 글 쓰는 삶의 필연이었다면 4·3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좀 더 우연과 타인의 개입이 두드러진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역시나 작가를 연상시키는 화자 ‘나’는 아마도 광주일 ‘그 도시’에 대한 책을 쓰고도 한참 악몽에 시달린다. 꿈에서 그는 눈이 내리는 벌판에서 수많은 무덤들, 꼭 묘비처럼 검은 나무가 심긴 봉분들 사이를 걷고 있다. 뒤로 바닷물이 밀려와 무덤들은 서서히 물에 잠기고, 허겁지겁 뼈를 옮기지만 소용이 없다. ‘나’는 이곳이 광주라고 생각한다. 죽은 한 사람, 한 사람 관계를 맺는 애도의 글쓰기는 기다려주지 않고 다른 기억을 쓸어가 버리는 무심한 시간성에 취약하다.

“왜 이런 데다 무덤을 쓴 거야?”(10쪽)

의미를 찾지 못한 기록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나’는 오랫동안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작별을 준비한다. 그런데 남은 것들을 부탁할 유서에 차마 그런 수고를 맡아줄 이의 이름을 적을 수가 없다. 그가 가더라도 어찌 됐건 이 수신인은 미래에 분명히 올 것이다. 그로 인해 예상치 못한 고통을 겪고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하게 될 것이다. 그제야 그는 ‘처음부터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무덤은 필연적인 누군가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 깨달음이 그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해준다.

꿈의 풍경이 제주로 옮겨지는 것은 기록영화를 찍는 친구 인선에 의해서다. ‘나’는 인선에게 묘지를 함께 재현하는 작업을 제안하고, 눈이 와야 하니 강원도의 어디쯤을 생각한다. 그러나 선뜻 확신하지 못하고 ‘나’가 머뭇거리는 새 이미 그의 것이 아닌 기억의 공간은 인선이 사는 제주로 옮겨져 있다. 인선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와 둘이 살았다. 작업에 자신이 연루됐음을 ‘나’가 아는 때는 인선이 제주에서 묘비로 쓸 나무를 자르다 다쳐 서울로 왔을 때다. 인선이 절단된 손가락을 다시 붙이기 위해 상상 못 할 고통을 참는 것을 보며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이때 인선은 그것을 제주 집에 두고 온 새에게로 전이한다.

“아마가 아직 살아 있는지 봐줘. 살아 있으면 물을 줘”(65쪽)

한강의 작품 세계에서 새는 인간성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다. 인선이 키우는 앵무새는 사람의 말을 따라 하면서 목소리(phone)를 말(logos)로, 혼자만의 영역을 함께 사는 공간으로 만든다.5) 그러나 발화자 간의 환경적·신체적 차이는 이 대화를 애초부터 불평등하게 하고 그렇기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부단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가 중단되고 언제든 서로 혼자가 될 수 있다.

왜 나한테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한 걸까? 아프다 해도 나는 천적이 아닌데.

두 개의 그 붉은 구멍을 응시하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눈동자 같은 그것들을 지켜보면 뜨거운 말이 쇳물같이 흘러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우린 대화를 나눴어, 너도 봤지. 작업대에서 내려서며 인선이 물었다.

사실은 어떤 말도 나눠진 적 없었던 걸까?

새는 새였고, 나는 인간이었을 뿐일까?(196쪽)

상대에 대한 나의 취약한 이해도를 계속해서 점검할 수밖에 없게 하는 새의 저 자리는 사실 어머니의 것이다. 인선의 어머니는 4·3 직전 겨울에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을 잃었다. 심부름을 갔다 오는 동안 학살을 피한 어머니는 인선이 열일곱이 될 때까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기까지 ‘빨갱이’로서 사살된 이유를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그가 설명할 수 있기까지는 여러 조건이 필요했을 것이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오빠는 군경에 잡혀 대구형무소로 보내지고,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4·19 이후 만들어진 경북지역 유족회의 진상규명 운동은 국가에 설명의 책임을 묻는 계기가 되지만, 이 역시도 좌익 아닌 ‘억울한’ 죽음들을 가리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6) 함께 활동했던 유족회 회장이 반공주의 군부정권하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어머니는 다시 침묵한다. 진상규명 운동이 1990년대에 와서 시민단체 중심으로 부상하고 다른 말하기가 가능해질 때까지, 제대로 듣는 이가 올 때까지 그는 잊어서는 안 되는 과거와 그것을 말할 미래를 동시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가는 새처럼.

어머니의 기억은 여러 곳에 산발적으로 저장된다. 총살 직전 오빠가 보낸 편지, 유족회의 흑백 단체 사진, 유해 발굴이나 진상규명 활동과 관련된 신문 기사. 어머니는 이것들을 옷장 서랍 속에 모았다. 저장된 것은 문서만이 아니다. 칼질하다 피가 나면 어머니는 모두가 죽은 그날을 떠올린다. 아직 숨이 붙은 동생을 수혈해야겠다는 생각에 제 손가락을 깨물어 물렸던 그 밤을. 정신이 흐려지면서 어머니는 인선을 붙잡고 손가락을 물리기도 하고,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312쪽). 안방을 집으로, 부엌을 숲으로 여겨 인선을 끌고 가 식탁 아래에 숨기도 한다. 기억을 필사적으로 감각과 타인과 지형에 저장하는 어머니에게 잃은 것은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를 서사나 의미로 전환하는 한 인지 방식일 뿐이다.7)

어머니를 돌보는 인선은 그 기억을 이어받는다. 그가 기록 영화의 서술 방식보다 눈 내리는 무덤의 풍경을 찍기로 택한 것은 저 감각을 걸러내지 않기 위해서다. 그것은 한강이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온 길이기도 하다.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 온 사람들처럼.(287쪽)

서사의 불가능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시, 목소리는 말이 돼야 한다. 내가 알고 느낀 것을 누락하면서, 나의 어떤 부분을 도려내면서 드러나는 서사는 취약하다. 무의식으로 들어간 잔여물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고,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글쓰기는 정지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불투명성을 뒤로하고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것이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영상을 아버지에게 바치는 것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사의 수신자는 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하는 죽은 자들이 아니라, 언젠가는 듣게 될 나중의 사람들, 미지의 수신자다. 이 잠재적 대화의 가능성에 기대 가장 설명 불가한 것을 설명 가능한 것(the narratable)으로 바꾸는 한강의 글쓰기는 그래서 말걸기의 글쓰기다. 말을 물고 날아간 새는 등 뒤에 남겨둔 것에 비하면 턱없이 가볍고 연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력함과 같을 수 없다. 그 취약성의 자리에서 다른 어떤 생명보다도 오래 생존할 수 있는 종적 시간이 탄생한다는 것을 우리는 더 확인할 것이다.

3.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서로 다른 조각들

서사는 그것을 끌고 갈 하나 이상의 개체가 확보되어야 시작될 수 있다. 한강의 소설은 사건을 보고 듣는 한 신체가 겪는 서사화의 버거움, 그 고통과 고립을 보여준다. 한편 정세랑 작가는 여러 신체를 통해 이 취약성을 보완하는 전략을 보여줘 왔다. 단편 ‘웨딩드레스 44’(<옥상에서 만나요>, 2018)에서는 44명의 여성들이 한 벌의 웨딩드레스를 거쳐 가며, <피프티 피플>(2016)에서는 51명의 생존자가 재난의 현장―극장에 모인다. “같은 사람들이 많을수록 다른 사람들이 필요”8)하다는 지론에 따라, 가장 멀리 떨어진 이들을 한데 모으고 그 거리감에 의해 각자의 독특한 개성과 관계를 창출해내는 정세랑의 내러티브 기계는 새보다는 비행기에 가깝다. 출발과 도착점은 모두 같지만 전후 맥락과 비행의 경험은 다른 이들을 태우고 어디론가 향하는 기계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시선으로부터,>(2020)는 화가이자 작가였던 심시선의 십 주기 제사를 위해 자손들이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갔다가 오는 이야기다. “엄마 제사를 지내야겠어”(10쪽) 큰딸 명혜의 선언으로 시작되는 기억 의례는 생전에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9쪽)이라 했던 엄마의 뜻대로 다른 형식을 취한다. 시선이 한국전쟁 당시 T시를 떠나서 갔던 하와이에 온 가족이 모여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83쪽)을 수집하는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모르는, 이방인―난민으로서 시선의 삶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시선의 경험과 감각을 공유했던 땅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만이 아니라 기쁨으로 죽은 자와 연결되는 애도에서, 상실을 슬퍼하는 장례는 기억을 기뻐하는 축제가 된다.

한강의 애도가 한날한시에 죽은 사람들을 얼굴 없는 하나의 집단으로 뭉뚱그리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한 사람으로 나타난다면, 정세랑의 제사에는 고인 한 명의 초상(肖像)이 특정한 양식으로 뚜렷해지는 것을 막고자 여러 사람이 모인다. 집단적 상상과 기억의 결과가 하나의 상이라면 이 이야기는 심시선이라는 여성 예술가의 자서전 내지는 증언록을 빌려 보충하는 가족사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초점은 인물의 일생을 샅샅이 아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어떤 불일치가 계속된다. 시선의 생일날, 가족 식사까지 치르고 집에 돌아가 새벽에 홀로 맞이한 엄마의 임종이 자연스러운 수면사인지 자살인지에 대해서도 세 딸과 아들 간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와이에서 독일인 화가 마티아스를 만나 오랜 기간 후원과 정신적·신체적 학대를 동시에 경험했던 할머니가 과연 행복했을지 손녀 우윤과 지수의 추측이 서로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더 어린 우윤이 할머니와 공유한 시간이 짧다는 것에서 느끼는 상실처럼 나의 해석이 이뤄지는 위치는 불가피하게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들은 서로 다른 시선의 조각을 재료 삼아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재생산한다. 주조의 틀은 나의 육신으로 살아온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 장손인 화수는 임신한 몸으로 이전 직장을 다닐 때, 회사의 부당한 요구를 받은 협력업체의 사장이 염산 테러를 벌여서 유산한 적 있다. 책임을 물을 가해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화수는 시선의 글을 읽으며 마티아스가 홧김에 유화 칼을 던져 생긴 할머니의 상처에 자신의 상처를 덧대고, 단단하고 담담한 시선의 어조에서도 모종의 금을 발견한다.

T에서의 학살이 있고 몇 년 지나지 않았으니 조각난 상태, 무척 조종당하기 쉬운 상태이지 않았을까? 할머니에게 그 점을 짚어 알려주고 싶었다.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111쪽)

기억의 파편성은 곧잘 공격의 대상이 된다. 전쟁 중 T시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로 심시선은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러나 국가는 시신들을 파묻어 증거를 인멸했고 시선은 부역자의 가족이란 혐의로 폭력의 역사를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다. 물질적 증거와 이성적인 설명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기억은 쉽게 거짓으로 의심받는다. 명혜가 엄마의 과거에 대해 얘기했을 때 직업군인이었던 첫 남편은 “전쟁 중에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아? 인민군이 죽이고 날조한 거야”라며, 시선의 트라우마를 “오해”로 치부한다(78쪽). 주인 없는 뼈들과 소문으로만 알 수 있는 가족사는 더없이 불충분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개인과 집단은 그 흐릿한 역사에 기반을 둔 현재를 살아간다.

그러나 반대로 폭력의 증거를 인멸하고 기억을 부정함으로써 얻어진 명예 또한 일시적으로만 빛날 뿐이다. 시선이 마티아스와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말레이시아계 독일인인 요제프 리와 동거를 시작하자 마티아스는 유서를 쓰고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자신의 ‘사랑’과 시선의 ‘배신’을 운운한 마티아스의 유서는 예술 거장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조력을 통해 가해/피해의 관계를 전환한다. 재능 있는 화가를 파멸로 몰아넣은 아시아 여자라는 비난은 아방가르드나 아량으로 포장된 제국-남성 중심적 권력을 수호하기 위한 전략이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178쪽)

시선의/정세랑의 이 문장은 잘 알려졌다시피 2020년 여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희롱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막기 위해, 반성폭력 운동에서 활발히 인용되었다.

피해자에게 과도하게 그 증명 책임을 전가하는 증거인멸 및 부정의 정치에 맞서려면 소거된 증거를 신비화하지 않고 다른 말하기를 시도해야 한다.9) 그 자신도 ‘사랑이냐 폭력이냐’와 같은 이분법적 사실 확인에 집착할수록 모든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기에, 시선은 폭력을 자기 기록의 일부로 남겨둔 채 다른 이들을 위한 페이지를 펼친다.

“애도에서 다음 애도의 웅덩이로 텀벙텀벙 걸으면서도 다 놓아버리지 않은 것은, 내가 먼저 죽은 사람들의 기록관이어서였다. 남은 사람이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어떤 의미로는 친구들에게 져 술래가 된 것이다.”(239쪽)

시선은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화가로 활동했던 여자친구 민애방을 기록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경력 끊긴 여성 예술가의 새 개인전을 위한 비평에 자신의 권위를 아끼지 않는다.

남성 없이도 할 수 있는 여성의 역사-쓰기, 상이한 방식과 계기로 주변인들을 잃은, ‘어쩌다보니 마지막으로 남은’ 시선의 저 쓰기는 다시, 미지의 수신인을 향한 글쓰기다. “누가 이 기록을 읽을 것인가?”(240쪽) 그러나 <시선으로부터,>의 경우에는 물음과 답이 동시에 제시되고 있다. 각 장은 시선의 저술이나 연설, 인터뷰가 먼저 나오고, 뒤이어서 서로 다른 초점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치 인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읽어 간 과거 시선의 기록이 현재의 서사에 각주로 자리 잡는 듯하다. 이렇듯 20세기 사람이 애써 메우지 못한 금은 21세기 사람이 입을 여는 출구가 된다.

공양물을 찾기 위한 하와이에서의 모험(adventure)은 인물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이 행보는 다시 돌아가 모일 수 있는 집에 의해 탄력을 받는다. 같은 장소와 새로운 장소, 조상과 자손들의 이야기 사이를 오가는 소설 안의 반복은 폐쇄적인 회귀의 구조도, 한 가족/민족의 직선적인 성장/개척의 이야기로도 흐르지 않는 확장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와이라는 낯선 땅의 임시 거처에서 펼쳐지는 제사는 특정한 인물이 권위를 갖거나 과도한 노동을 떠맡지 않는다. 본래 집에서 치르는 제사는 그 집의 주인(戶主) 격인 인물들에게 조상을 모실 자격을 연령과 젠더에 맞춰 차등적으로 배분한다. 조상도 마찬가지인데, 인류학자 권헌익의 설명에 따르면 집에서 치르는 제사는 장소를 가진 조상신과 장소 없는 망령들을 위계적으로 구분한다.10) 어찌 됐건 하와이에서 이들은 이방인이다. 심시선은 이들에게 조상이지만 이 제사를 지켜보는 하와이의 구경꾼들에게는 과거의 한 난민이자 유령이다. 비록 고인은 생의 마지막만큼은 객사를 거부하고 집안에서 눈을 감기를 택했으나, 가족들은 집 밖으로 의례 공간을 확장하면서 타인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시킨다. 각자 관심사와 역량에 맞게 준비한 제사상 위 화수의 팬케이크를 위해 숙소 근처 팬케이크집의 사장은 작은 트럭을 몰고 온다. 우윤이 서핑하다 수집한 파도의 거품이나 규림이 다이빙 중에 구한 산호, 명혜의 훌라춤은 그것들을 가르쳐준 하와이인 선생님들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정세랑의 소설은 우연히 맞닥뜨린 낯선 존재가 전해주는 깨달음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은 배경지식이 얼마나 있느냐와는 무관하다. 가장 어린 초등학생 해림은 도감으로만 봤던 하와이의 토종 새들을 관찰할 생각에 설렌다. 그러나 의외로 자생종들은 쉽게 볼 수 없고 외래종들이 많이 보인다. 멀리서 날아왔거나 배를 타고 왔을 이 새들은 인종이나 혈통의 의미가 희미해진 하와이인들처럼 어느 순간 ‘로컬’이 된다. 해림에게는 이 모든 새들이 진화하고 멸종하는 역사가 사람의 역사만큼이나 중요하다. 새들이 유리창에 스티커가 붙어 있지 않아서, 풍등이나 풍선을 날리는 행사 때문에 사라진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기대보다 현저히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226쪽). 온라인에서 만난 외국의 버드워처(Bird Watcher)들을 빼고 말이다.

새로 알게 된 지식과 시선에 대한 기억을 나누면서 각자 “할머니가 나눠준 조각들이 다른”(13쪽) 것을 인지하고 그것이 불화나 불일치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서 비로소 가족들은 마티아스가 그린 시선의 초상화, ‘마이 스몰 퍼키 하와이안 티츠’ 앞에 설 수 있다. 이 많은 내레이터 앞에선 한 사람을 노출하고, 박제하고, 전시함으로써 완전한 소유를 주장하는 특권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그림 앞에서 누군가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왜곡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대상을 투영한다. 해림은 그림자로 그려진 박새들을 보고 ‘티츠(tits)’가 ‘박새’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박새는 어렵게 배운 언어로 계절 내 힘껏 노래했다 한순간 과묵해져 가벼운 깃털만을 남긴다. 이는 여기저기서 배운 언어로 “떨지 않고 떠드는 것이 내 역할”(325쪽)임을 자임했던 시선이 마지막 강연에서 젊은 사람에게 그 기회를 주라며 그만 말하겠다고 선언한 것과도 겹친다. 시대가 요구하는 중심을 포기했기에 일관되지 않고 오해받기도 쉬웠던 자신의 말하기를 시선은 다른 시대가 이어받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예측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21쪽)다는 저 믿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4. 그럼에도 우리는 이야기하고

이야기(narration)는 한 권의 책으로, 한 편의 소설로 세상과 마주했다고 해서 고정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미래를 향해 무한히 열린 상호관계 속에 있다.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은 이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응답하는가 하면, 이전의 서술자가 보지 못했던 자료, 기억, 말하기 방식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잠재적 관계성에 따라 서사는 고정되지 않고 그 의미가 유동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언어는 유동하는 기억을 묶기 위한 장치이지만 그 자체로 고정되지 않고 언제나 그 안팎에서 말이 흘러넘치는 채로 있다.

기억의 유동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돌봄’이 필요한 취약성이라고 한다면, 이는 어떤 불가능성이나 극복해야 할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를 인정하고 다른 이야기로 확장할 가능성이다. 한강과 정세랑의 소설에서 그 가능성은 ‘어머니’의 장소로 날아가서 그 공간에 담긴 기억을 체험하는 인물들에게 나타난다. 기록과 자료가 어머니로부터 딸에게로, 딸의 친구 혹은 자손에게로 전달되면서 이야기는 생성된다. 출발점이 되는 어머니의 말하기는 상징계의 언어나 의식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지 않다. 검열 때문이든 트라우마나 치매의 문제이든 간에 부분적으로 잘린 부분도 많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그들의 말-조각은 서사적이거나 사실적인 인식만이 역사나 기억을 구성한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한없이 가벼울지 모른다. 어딘가 붕 떠 있는 그 느낌은 마고할미나 펠레 여신의 이야기처럼 역사가 아닌 신화에 가깝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가볍기에 이 말들은 공포 없이 비행할 수 있고, 중심을 벗어나 더 많은 타자를 만날 수 있다. 엘렌 식수는 여성이 기존의 남성중심적 지식과 언어 속에서 날면서/훔치면서(voler)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하며, 그러한 이동의 글쓰기가 역사가 금지하고 현실이 배제한 타자를 찾을 가능성에 주목한다.11)

식수의 표현대로 움직이지 않는 오래된 껍질을 화산처럼 들어 올리면서 써지는 여성의 글을 우리는 오랫동안 묻혀 있던 폭력의 역사를 조명하는 한강의 제주도, 그리고 제사라는 가부장적 질서를 어머니의 역사 쓰기로 전유하는 정세랑의 하와이에서 찾아보았다. 섬은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인간의 시각에서는 고립되어 있지만 하늘을 날거나 수면 아래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바깥과 위아래, 미지의 삶들과 우연히 마주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날아온 가벼운 조각들을 하나씩 쥐고 이야기를 잇는 작업은 가능할 것이다.

각주>>

1)엘렌 식수·카트린 클레망, <새로 태어난 여성>, 이봉지 옮김, 나남, 2008, 172쪽.

2)Jules Michelet, Ouevres Completes, XXI, p.268.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서지원 옮김, 길, 2018, 293쪽에서 재인용. 앤더슨은 죽은 자를 대신해서 저술한다는 미슐레의 역사가 자의식이, 식민 지배 이전의 문명들을 대신해 말하는 식민자들의 민족주의에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3)Catriona Mortimer-Sandilands, “Landscape, Memory, and Forgetting: Thinking through (my mother’s) body and place”, Material Feminisms, edited by Stacy Alaimo and Susan Hekman, Indiana University Press, 2008, pp.265~287. 모티머-샌딜랜즈는 일관되고 서사적인 자아의 인지만이 기억과 역사를 구성한다는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즉각적인 운동 기억을 통해 풍경-세계와 신체적으로 만나는 몸에 주목한다.

4)이 글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작품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와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문학동네, 2020)이다. 본문에 인용할 때는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5)포네와 로고스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인간성의 중요한 바탕이다. 모든 생명체가 목소리를 갖지만, 말은 인간이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구분해 가정과 도시를 형성하는 바탕이 된다. 이 테제에서 출발해 한나 아렌트는 말의 계시적 성격이 온전히 작용할 수 있는 ‘타인과 함께함’을 인간의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한길사, 2019, 278쪽.

6)노용석,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 산지니, 2018, 118쪽. 1960년대 민간인 학살 피해 유족회 조직이 경상남북도를 중심으로 이뤄진 것도 인민군과의 접촉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7)Catriona Mortimer-Sandilands, ibid., p.275.

8)정세랑, <피프티 피플>, 창비, 2016, 110쪽.

9)권명아는 진보 집단을 방어해야 한다는 담론 속에서 형성된 성폭력 부정주의가 역사 수정주의, 기후위기 부정주의와 같은 ‘부인의 정치학’에 있어 새로운 형태라고 보며, 부정주의에 맞선 대안 정동의 형성으로서 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지은씨의 저서 <김지은입니다>에 주목한다. <성폭력 부정주의의 정동적 힘과 대안적 정동 생성의 ‘쓰기’>, <여성문학연구> 52, 한국여성문학회, 2021 참고.

10)권헌익은 베트남의 가족 제사(cung gio)에 주목하며, 사적이고 탈중심화된 이들의 기억 의례가 전쟁과 학살의 역사를 어떤 공적 기록보다 포괄적으로 남긴다고 분석한다. 가령 하미 마을과 같은 집단 학살지에서는 조상의 시신이나 정확한 죽음의 장소를 확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의례 참여자는 ‘집’과 ‘길’ 사이에서 양자택일적인 기억의 공간성을 만들어 조상/망령, 외부/내부의 구분을 무너뜨린다. <학살, 그 이후>, 유강은 역, 아카이브, 2012, 162쪽.

11)엘렌 식수·카트린 클레망, 앞의 책, 174~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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