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비의 칼과 펜

민주정이든 군주정이든, 욕망에 눈먼 권력자의 나라에 미래는 없다읽음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20) 아리스토텔레스와 좋은 정치체제

토마스 아퀴나스. 아스콜리 피체노 제단화, 카를로 크리벨리 작, 1476년.

토마스 아퀴나스. 아스콜리 피체노 제단화, 카를로 크리벨리 작, 1476년.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적 정치체제’ 찾기에 무게 두기보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의 다양성 탐구
‘전체의 이익을 위한 통치’라는 주장이 뻔한 듯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실천에 옮긴 경우는 많지 않아
중세 혼란기에 사라졌던 그의 저서 ‘정치학’…1260년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석서로 다시 빛 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모여 살게 되어 있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모여 힘을 합쳐야 개개인도 먹거리를 구하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며 나아가 사람다운 품위를 따지며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의미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는 이미 지난 18회에서 했다. <정치학> 3권에서는 정치적 동물의 의미를 약간 포인트를 바꿔 설명한다. 마치 개미나 벌이 본능에 따라 모여 살 듯 인간도 군집 생활을 하도록 정신 어딘가에 처음부터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투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모종의 본능 같은 것에 이끌려 인간이 모여 산다는 말은 상당히 거슬릴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또 그렇게 믿도록 수천 년간 우리의 귀와 마음이 훈련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 동물적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는 생각은 좋게 들리지 않을 수 있다.

여담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에는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곳이 여러 곳 있다. 앞에 한 이야기와 뒤에 한 이야기가 다르다는 뜻이다. 단지 초점이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서양 정치사상사의 바이블처럼 여겨지는 저작의 상태가 이 모양이라는 것은 상당히 유감이다. 학자들은 어떻게든 아귀를 맞춰보려고 애쓰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여하튼 인간들이 모여 사는 한 어떻게 모여 살 것인가의 문제를 떠날 수 없다. 어떤 질서를 이루어 살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권위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셋 정도로 구분했다. 하나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다. 이런 관계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제적이라고 불렀다. 한 측은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부리며 다른 측은 이것을 무조건 따르는 관계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가장이 식솔들, 즉 아내와 아이들과 맺는 관계이다. 노예와 달리 이들은 자유민이다. 다만 그들은 성인 자유민 남성과 달리 완전한 시민이 아니다. 이들은 돌봄과 지도가 필요하다. 이 관계는 명령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관계는 아니다. 군주가 자신이 다스리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 세 번째는 자유민들 간의 관계이다. 이들은 평등하게 의무를 나눠 지고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 관직도 돌아가며 맡는다. 일종의 민주주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역사에서 최초에는 이런 식으로 공동체가 유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번째 유형의 정치체제가 장점이 많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라 결론 내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민들이 관직을 맡든 법정에 한자리 차지하든 국가의 업무에 참여할 기회를 가지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똑똑하고 개인의 이해관계나 욕심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이 정치를 맡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선호했던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를 굳이 따져 묻는다면, 과두정과 민주정 사이 어딘가에 시선을 두었다고 말하는 편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민주정에서는 모든 사람을 제비뽑기에 따라 무작위로 관직을 맡게 한다. 이런 체제에서는 개나 소나 운만 좋으면 관직을 얻는다. 과두정에서는 재산 수준에 따라 사람을 뽑아 쓴다. 이런 체제에서는 능력이 있어도 재산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둘 다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생각한 이상적 정치체제는 제비가 아닌 선출을 관리 임명의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과두정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선출의 기준을 단순히 재산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민주정의 요소를 받아들인다.

물론 이상적 정치체제라는 것에 너무 큰 무게를 둘 필요는 없다. 그는 한 공동체의 전통이나 생활환경 따위에 맞게 정치체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심지어 군주가 지배하는 정치체제라 하더라도 상황에 맞게 제대로만 돌아간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지난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대제국의 시대를 살아간 거대제국의 이론가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정치체제에 대한 그의 이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이전에도 몇 번 이야기했지만, 플라톤은 아테네 정치의 개혁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무엇이 이상적인 정치체제인가 하는 질문은 아주 중요했다.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그려봄으로써 현실 정치개혁의 실질적 가이드라인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정치개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은 훨씬 엷었다. 그의 관심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이를 분류하며 종합하는 데 있었다. 기원전 4세기는 그리스 안과 바깥 세계에 대한 지식 차원에서 이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했다. 헤로도토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해보면 시간으로는 불과 한 세기도 안 되는 사이에 지식의 양과 질, 정확성에서 눈을 의심할 만큼 큰 발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교역의 증가만으로 이 모든 진보를 설명할 수는 없다. 페르시아 전쟁 이래 동지중해를 가운데 두고 그리스 세계와 페르시아 제국, 이집트와 흑해의 다양한 정치집단이 거의 두 세기 동안 각축해왔다. 크고 작은 분쟁과 협상이 꼬리를 무는 동안 접촉이 잦아졌고 아는 것도 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거대한 제국 안에서 교류에 가속도가 붙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방대한 지식체계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도움받은 바가 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존하는 모든 정치체제를 다 좋다고 여겼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시민, 이상적인 정치가는 자신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만일 욕망에 눈이 먼 자들이 권력을 쥔다면, 그것이 한 사람이든, 혹은 부자들이든, 아니면 다수 가난한 사람들이든 그 나라에 미래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지혜와 윤리가 아니라 힘과 부를 숭배하며 그런 사람들이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하도 상식 같은 것이라서 힘주어 말하려다가도 힘이 빠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그전에도 이후에도, 서양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혹은 다른 곳에서도 정치이론가들이 허구한 날 읊조려온 것이 정치가는 자신이 아니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비극이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이야기를 그나마 어느 정도 실천에 옮기고 있는 나라들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그의 <정치학>이 걸어간 길은 하도 복잡해서 그 자체로 두꺼운 책 한 권이 필요하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아쉬운 면이 있어, 여기서는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대체로 과거 서로마 제국이 지배했던 지역에 한정해 짧게 이야기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던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희극편 필사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비극을 그렸다. 물론 이야기는 창작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작품의 상당수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사이에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을 빌린 온갖 위작들이 더해졌다. 중세 도서관의 장서 목록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분류된 작품들을 찾아보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매우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치학> 주석서, 1478년, 스페인 국립도서관 소장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치학> 주석서, 1478년, 스페인 국립도서관 소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도 중세로 넘어가는 혼란 통에 사라져버린 저작 중 하나이다. 아랍이 지배하던 이베리아반도를 경유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이 번역과 주석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서양의 중세라는 것이 워낙 지적 수준에서 타 문화권에 비해 뒤떨어져 있다보니 그리스 문헌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1260년대 토마스 아퀴나스의 친구 빌렘 모어베크는 <정치학>의 제대로 된 라틴어 번역을 내놓았다. 토마스는 이 본을 이용해 <정치학>에 대한 주석서를 썼다. 이뿐만 아니라 <군주정에 대하여(De regno)>라는 제목의 소책자도 저술했다. 이 작품은 고대 세계가 문을 닫은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이론을 이용해 저술한 최초의 체계적인 정치이론서이다. 애석하게도 이 작품은 2권 4장에서 중단되었다(나중에 그의 어린 동료였던 바로톨로메오 루카가 완성했다). 토마스는 불과 50세에 죽었는데, 그나마도 마지막 몇 년은 치매나 어떤 정신질환을 앓았던 것 같다. 섬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쨌든 그는 스스로 붓을 꺾었고 그 탓에 <군주정에 대하여>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서서히 정치이론의 표준서로 자리를 잡았다.

■연재를 마치며

한국 사회는 1980년대까지 통제받지 않는 폭력이 사회를 압도하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해왔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진 군부 쿠데타와 강권통치를 말한다. 칼이 펜을 꺾었던 시기이다. 해직당한 기자, 강단에 서지 못하는 교수와 교사, 출판인들에게 강요된 금서목록 이들이 모두 꺾여 나간 펜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축하해야 할 일은 결국 펜이 칼을 이겼다는 것이다. 글과 사람들의 지배, 곧 문민의 지배이다. 펜은 당장은 칼 앞에 무기력하지만 대신 사람들을 설득하고 모음으로써 결국 칼을 길들이고 지배한다. 한국 사회는 펜의 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사회이다.

세계사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펜이 칼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는 사회는 그리 많지 않다. 서유럽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미국과 캐나다, 덧붙여 호주와 뉴질랜드, 동아시아에서는 이웃 일본, 대만 정도가 그런 나라로 분류될 수 있다. 여기에 인도나 중남미의 몇 나라를 더 추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나라들은 여전히 펜이 칼을 통제하는 사회를 향한 긴 사다리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 정치테러와 쿠데타가 일상인 나라들도 적지 않다.

지난 20회를 거쳐오며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정치사상의 발전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던 것은 칼과 펜의 관계에 대한 인류사 초기의 사고 흐름을 짚어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는 폭력이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삶에서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던 곳이었다. 내란과 전쟁으로 피가 마를 새가 없었다. “이런 폭력을 어떻게 길들일 것인가?” “어떤 폭력은 허락하고 어떤 폭력은 막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고대 그리스 정치사상을 이끌고 간 동력의 하나였다.

연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멈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칼과 펜의 관계를 둘러싼 이야기들의 종착점이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남은 이야기들은 다른 기회에 쓰려 한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시리즈 끝>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윤비의 칼과 펜] 민주정이든 군주정이든, 욕망에 눈먼 권력자의 나라에 미래는 없다

정치이론을 역사 및 문화와 관련지어 연구한다.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과 및 역사학과,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을 강의하였다. 가르친다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산다. 2021년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독일에서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2018~2020년 한겨레 신문에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를 연재하였고, EBS <지식의 기쁨> <세바시> 등에서 강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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