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 허물처럼 ‘입는 조각’으로 편견 넘어 자유 꿈꾸다읽음

도재기 선임기자

아트선재센터, 하이디 부허 아시아 첫 회고전

가부장적 위계에 맞선 ‘부드러운 조각’ 등 선보여

30대 여성작가 그룹전, 안은미 컴퍼니 등 연계

스위스의 여성주의 작가 하이디 부허의 아시아 첫 회고전이 아트선재센터에서 28일 막을 올렸다. 사진은 부허의 대표적 ‘스키닝’ 작업인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가운데)과 ‘작은 유리 입구’(왼쪽) 전시 전경. 사진 CJY ART STUDIO. 아트선재센터 제공

스위스의 여성주의 작가 하이디 부허의 아시아 첫 회고전이 아트선재센터에서 28일 막을 올렸다. 사진은 부허의 대표적 ‘스키닝’ 작업인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가운데)과 ‘작은 유리 입구’(왼쪽) 전시 전경. 사진 CJY ART STUDIO. 아트선재센터 제공

잠자리는 날기 위해 10~15번 정도 허물을 벗는다. 물속에서 알이 부화해 애벌레가 되고, 작은 유충은 몸집을 키울 때마다 껍질을 떨쳐내며 커간다. 성장기간은 종류에 따라 길게는 4~5년이 걸리도 한다. 날개가 돋기 시작하면 물 밖으로 나온다. 마지막 허물을 벗고 날개를 펼친다. 그야말로 우화등선(羽化登仙)이다. 허물, 껍질을 벗으며 인고의 시간을 보낸뒤 맞이하는 탈바꿈(변태), 날개의 펼침은 자유, 해방의 상징이다.

스위스의 전위예술가 하이디 부허(1926~1993) 작품 중 ‘잠자리의 욕망’(1976)이 있다. 잠자리 모양의 옷으로, ‘입을 수 있는 조각’이다. 이 작품은 여성주의 미술가 부허의 삶과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한 단초다.

부허는 삶과 예술에서의 자유, 해방을 꿈꿨다. 1970~1980년대 스위스와 유럽의 견고한 가부장적·위계적 체제, 여성을 향한 편견과 차별에 예술적으로 맞섰다. 조각사로 보면 반영구적·고정적인 모더니즘 조각을 거부하고 새로운 조각을 선보였다.

가부장적 공간에서 ‘피부’를 벗겨내는 하이디 부허의 스키닝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1978, 싱글 채널, 촬영 인디고 부허,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왼쪽)과 전시된 스키닝 작품의  세부 모습(도재기 선임기자, 오른쪽).

가부장적 공간에서 ‘피부’를 벗겨내는 하이디 부허의 스키닝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1978, 싱글 채널, 촬영 인디고 부허, 제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왼쪽)과 전시된 스키닝 작품의 세부 모습(도재기 선임기자, 오른쪽).

하이디 부허의 ‘부드러운 조각’의 하나인 ‘잠자리의 욕망(1976, 텍스타일  라텍스  자개 안료) 전시 전경(왼쪽)과 당시 ’잠자리의 욕망‘을 입은 하이디 부허 모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아트선재센터 제공

하이디 부허의 ‘부드러운 조각’의 하나인 ‘잠자리의 욕망(1976, 텍스타일 라텍스 자개 안료) 전시 전경(왼쪽)과 당시 ’잠자리의 욕망‘을 입은 하이디 부허 모습.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아트선재센터 제공

조각을 기반으로 퍼포먼스·설치·드로잉 등 매체를 넘나들며 선구적 페미니즘 조형작업을 펼친 부허의 대표적·독창적 작업은 ‘스키닝(skinning)’이다. 작가가 이름 붙인 ‘스키닝’은 특정 공간과 사물에 새로운 피부·껍질을 만든 뒤 잠자리가 허물을 벗듯 이를 다시 떼어내는 작업을 말한다. 공간 전체에 얇은 천을 붙이고 라텍스로 굳힌 뒤 떼어내면 그 피부는 해당 공간의 표면 형상은 물론 공간이 지닌 시간, 이야기 등도 담아낸다. 떼어내는 힘든 과정은 행위예술이고, 떼어낸 그 피부는 조각이 된다.

부허는 당시 유럽의 가부장적 남성·아버지 공간을 상징하는 서재의 벽,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집의 마룻바닥, 여성 혐오·차별에 기반한 질병 ‘히스테리아’ 전문가였던 정신과 의사 빈스방거의 병원 진찰실 등을 스키닝했다. 빈스방거는 정신분석학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대표적인 히스테리아 권위자였고, 히스테리아로 인해 여성들은 제대로 된 치료 대신 정신병원에 보내져야 했다.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공간의 스키닝은 그 공간이 상징하는 가부장적 위계와 권위, 여성 억압과 차별, 불평등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의미한다. 잠자리가 보호막인 피부를 찢어내고 탈바꿈 과정을 거쳐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듯 부허는 공간을 탈바꿈시키고 거듭나게 하고자 했다. 자신의 작업을 “해방과 자유를 향한 변신의 과정”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부허는 공간과 더불어 몸에 대한 탐구를 통해 조각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쇠·돌 같은 반영구적 재료로 거대하고 단단하고 고정적인 모더니즘 조각에 반기를 들었다. ‘입을 수 있는 조각’ ‘움직이는 조각’ ‘부드러운 조각’을 선보였다. ‘랜딩스 투 웨어(Landings to wear)’ ‘바디 쉘’ ‘바디 랩핑’ 등 신선한 작업들이다.

하이디 부허의 조각 ‘오늘 물은 항아리 밖으로 흘러나온다’(1986, 텍스타일, 라텍스, 나무 등, 왼쪽)와 ‘무제’(1985, 종이에 수채, 오른쪽).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리만 머핀 제공

하이디 부허의 조각 ‘오늘 물은 항아리 밖으로 흘러나온다’(1986, 텍스타일, 라텍스, 나무 등, 왼쪽)와 ‘무제’(1985, 종이에 수채, 오른쪽).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리만 머핀 제공

하이디 부허의 ‘랜딩스 투 웨어’(1970, 미국 뉴욕, 왼쪽)와 부허가 아들인 인디고, 메이요와 함께 펼친 ‘바디랩핑’ 작업인 ‘인디고, 메이요와 함께 몸을 감싼 하이디 부허’(1972, 미국 산타바바라 할리우스 힐스).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아트선재센터 제공

하이디 부허의 ‘랜딩스 투 웨어’(1970, 미국 뉴욕, 왼쪽)와 부허가 아들인 인디고, 메이요와 함께 펼친 ‘바디랩핑’ 작업인 ‘인디고, 메이요와 함께 몸을 감싼 하이디 부허’(1972, 미국 산타바바라 할리우스 힐스).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아트선재센터 제공

독창적 예술세계에도 불구, 부허는 생전에 조명받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 여성주의, 젠더 연구가 활발해지고 베니스비엔날레(2017), 독일 뮌헨의 하우스데어쿤스트의 대규모 회고전(2021)을 통해 비로소 세계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주목받고 있다. 하우스데어쿤스트의 안드레 리소니 관장은 부허를 모더니즘 조각사의 “게임 체인저”로 표현할 정도다.

‘잊혀진 예술가’에서 최근 국제적 조명을 받고 있는 하이디 부허의 치열한 예술세계, 삶을 살펴보는 기회가 마련됐다.

아트선재센터에서 28일 개막한 아시아 첫 회고전 ‘하이디 부허: 공간은 피막, 피부(Heidi Bucher: Space are Shells, are Skins)’다. 모두 130여점이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다. 대표작인 스키닝 작품들을 비롯해 ‘소프트 오브젝트(부드러운 조각)’ 시리즈, 초기 드로잉, 색채 실험이 돋보이는 평면 작업들, 퍼포먼스 등 영상 기록, 말년의 물을 주제로 한 조각 등이 망라됐다. 전시장에서는 ‘바디 랩핑’을 재제작해 관객들이 직접 입어보는 체험도 할 수 있다.

부허의 회고전은 한 세대가 훌쩍 지난 지금 그의 작품, 예술세계를 여기 우리 앞에 왜 소환할 수밖에 없는지를 되묻는다. 차별과 혐오, 불평등과 부조리가 여전히 배회하면 할 수록 그의 작품이 전하는 울림은 클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전시회다.

회고전과 연계한 다양한 행사도 열려 주목할 만하다. 박론디·박보마·우한나 등 국내 30대 여성작가 그룹전 ‘즐겁게! 기쁘게!’가 부허 전문가이자 미술사학자·큐레이터인 추스 마르티네스의 기획으로 마련됐다. 또 안은미 컴퍼니(4월10일), 레지스터 코리아와 스위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이자 안무가 클레어 메구미, 박론디 작가 3인이 각각 펼치는 퍼포먼스(5월18일)도 예정됐다.

전시기획자인 김선정 예술감독과 문지윤 프로젝트 디렉터는 “이번 전시는 연대기적 방식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공간’과 ‘몸’으로 구분해 부허의 세계를 재구성했다”며 “전시를 통해 네오 아방가르드 미술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부허의 도전과 모험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질문하고 새로운 변신의 공간이 생산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유료이며, 6월25일까지다.

하이디 부허의 ‘부드러운 조각’의 하나인 ‘안나 만하이머와 타겟’(1975, 텍스타일, 라텍스, 자개 안료 등, 왼쪽)과 스키닝 작업인 ‘바닥 피부(선대의 집), 파르케트 플로어링, 룸 12, 1층’(1980, 황마, 라텍스 등).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제공

하이디 부허의 ‘부드러운 조각’의 하나인 ‘안나 만하이머와 타겟’(1975, 텍스타일, 라텍스, 자개 안료 등, 왼쪽)과 스키닝 작업인 ‘바닥 피부(선대의 집), 파르케트 플로어링, 룸 12, 1층’(1980, 황마, 라텍스 등). 하이디 부허 에스테이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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