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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맛 나는 우리말…‘옛것’도 ‘새것’도 갈고닦아야 살아남는다

김지원 기자

한글·한국어의 생태계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한 1953년 정전협정문. 탈네모꼴의 글자체가 인상적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공병우 타자기로 작성한 1953년 정전협정문. 탈네모꼴의 글자체가 인상적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한글 타자기 발명의 역사는
아마추어 발명가들의 역사

원리를 지키되 실효성 추구한
안과 의사 공병우의 ‘세벌식’
창제 원리와 ‘모아쓰기’가 본질
글씨 모양보다는 신속성 중시

시대 흐름에 따라 바뀌는 단어들
적극적으로 ‘발굴·발명’하되
조어 원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고
마음을 때리는 말이 생명력 얻어

세종대왕에게 받은 훌륭한 보물
생명을 불어넣고 갖고 놀아야

지난 15일은 스승의날이었는데요. 여기서 ‘스승’은 세종대왕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1회 스승의날 행사가 치러진 1964년만 해도 5월26일이었는데, 이듬해부터 겨레의 스승인 세종대왕 탄생일인 15일로 옮겼다고 하죠. 스승이 세종대왕만큼 존경받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합니다.

세종대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저는 한글과 관련해 예전부터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던 점이 있습니다. 한글 관련 글, 기사엔 으레 비슷한 반응이 붙는다는 것인데요. ‘기승전-세종대왕 만세’입니다. 예를 들면, 20세기 한글 타자기 원리를 소개하는 게시물에도 ‘세종대왕 만세’라고 댓글이 달리고 절묘한 표현력에도 ‘세종대왕 만세’라고 흘러가는 식입니다.

물론 세종대왕을 향한 찬사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날 한글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세종대왕 만세!’라고만 생각할 경우, 어쩌면 우리는 그것이 이미 ‘완전체’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게 될 우려가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럴 경우 우리의 삶 속에서 실질적으로 한글을 지켜오고 더 풍성하게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해 온 많은 사람들의 헌신, 노력이 간과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굳이 한글의 불편함이나 부족함을 곰곰이 관찰할 이유도, 그리고 우리가 더 낫게 가꾸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웬만해선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은 ‘완성형’이니까요.

하지만 오늘날의 한글·한국어 생태계가 이루어지는 데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발명, 희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철저히 문제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열린 마음으로 해결책을 찾고 또 새로운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글은 더욱 편리하고, 풍성해졌고요.

오늘 레터에선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나름의 방식으로 한글·한국어를 ‘발명’하고 만들어 온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도 어떻게 이를 가꾸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965년 경향신문 지면에 실린 공병우 타자기 광고.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5년 경향신문 지면에 실린 공병우 타자기 광고.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글 타자기 시대를 연 발명가들

독자님은 스마트폰 타자 치는 게 더 편하신가요? 손글씨가 더 편하신가요?

오늘날 우리는 익숙하게 스마트폰 자판과 키보드를 사용합니다. 예전엔 누구나 손글씨를 썼지만, 요새는 손글씨가 어색한 나머지 아이뿐 아니라 성인들도 손글씨 학원에 많이 다니고 있을 정도라고 하고요. 나중엔 심지어 인공지능(AI) 신기술로 스마트폰·키보드의 종말이 올 수도 있다고 하는데요. 선택을 예측해주거나, 말로 하면 되니까요. 중요한 것은 기계가 바뀔 때마다 ‘한글’은 큰 변화에 맞닥뜨렸고, 거기에 적응해야 했다는 것이죠.

김태호 교수가 쓴 <한글과 타자기>는 ‘20세기 한글 타자기 발명에 얽힌 흥미진진한 역사’를 담은 책인데요. 그런데 우선, ‘한글 타자기의 흥미진진한 역사’란 대목에서부터 약간 고개가 갸웃해질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한글 타자기를 만든 역사가 그리 복잡다단할까 싶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책을 붙잡고 읽어가다보면 20세기에 ‘한글 타자기’를 만드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0세기 초 ‘타자기’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영문 타자기였고요. 여기에 한글을 ‘이식’하는 과정엔 꽤 커다란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아쓰기’였죠. 오늘날엔 타자를 치면 프로그램이 알아서 활자 모양을 조절해주기 때문에 모아쓰기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타자기의 시대’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한글 타자기의 역사는, 곧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 ‘아마추어 한글 발명가’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한글 타자기 역사에서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공병우 박사(1907~1995) 역시 기계, 국어 전문가가 아닌 ‘유명한 안과 의사’였고요.

공병우 박사는 여러모로 독특한 인물이었는데요. 평생 졸업장 하나 없이 의사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 일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 최초의 안과인 ‘공안과’를 세웠으며 막대한 사재를 털어 맹인부흥원 등을 운영하고, 후원했습니다. ‘공병우 타자기’를 만든 아마추어 발명가이기도 합니다. 노년에는 사진가로 활동하기도 했죠. 자신의 원칙·철학에 따라 거침없이 반대 의견을 내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성향 때문에 1965년 한국일보에 ‘한국의 유아독존’ 10인 중 한 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런 독특한 고집과 철학은 그가 만든 ‘공병우 타자기’에도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그는 시종일관 원리를 지키되 실질적인 효율성을 추구하는 태도를 지녔다고 합니다. 단지 옛것이라고, 혹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추구한다고 해서 무작정 따라하지 않았죠. 그에게 타자기는 ‘글을 정확하게 빨리 쓰면 되는’ 기계였습니다.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의 특징은 빨리 쓰는 만큼 글자 모양이 못생겼다는 점인데요. 사람들이 “빨랫줄에 널어놓은 글자 같다”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글자 체제에 대한 과학적, 실용적 가치를 무시하고 종래의 근거 없는 다만 습관상의 미적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비과학적인 자체(字體)를 찍는 비능률적인 타자기를 고안하고 싶지는 않다”며 오히려 놀리는 사람들을 나무랐다고 하네요.

공병우 이전에 전혀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국 최초의 모아쓰기 타자기인 ‘이원익 타자기’(1914)부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송기주 타자기’(1933), ‘세로쓰기’ 타자기였던 ‘언더우드 타자기’(1916) 등도 일찍이 있었고요. 당대에도 조금 속도는 늦더라도 예쁜 글씨를 추구하는 ‘김동훈 타자기’(다섯벌식·점유율 2위) 등 많은 라이벌들이 각축을 벌였는데요. 1960년대 타자기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렸던 ‘공병우 타자기’는 주로 글씨 모양보다도 신속성을 중시하는 국방부 등에서 활용했고, 가지런한 글자 모양을 중시하는 부처에선 ‘김동훈 타자기’를 선호했다고 하네요.

얼핏 보기엔 공병우가 한글 타자기의 ‘효율성, 속도’를 위해, 많은 중요한 것을 가차없이 포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한글 타자기의 또 다른 본질을 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한글의 창제 원리와 모아쓰기라는 본질이죠. 그는 원칙을 지켜가는 동시에 동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했습니다. ‘옛것’과 ‘새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그의 자서전 속 한 대목을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나는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복잡한 것을 무조건 싫어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복잡한 것을 대했을 때, 나는 피하지 않고 이것을 단순한 것으로 풀어나간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가위로 싹독싹독 잘라 버리는 단순함이 아니라 복잡하게 엉킨 실의 방향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추적하면서 풀어가는 단순함이다.”(공병우,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

오늘날 ‘세벌식 타자기’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만, 그의 독특한 발명 정신은 1980년대 이후 효율성의 미를 추구한 폰트 디자이너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지를 추구하려는 정신은 그 이후에도 천지인 자판 등의 개발 과정에서 많은 아마추어 발명가들에 의해 실현되어 왔다고 볼 수도 있겠죠.

이런 북적북적한 열기는, 분명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완성형 선물’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한글과 타자기>(김태호 지음)와 <단어의 사연들>(백우진 지음) 책표지. 역사비평사·웨일북 제공

<한글과 타자기>(김태호 지음)와 <단어의 사연들>(백우진 지음) 책표지. 역사비평사·웨일북 제공

억지로 만든 ‘순화어’ 말고 말맛 나는 말

발명의 관점에서 ‘한글 타자기’를 바라보았는데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한글에 후세의 아마추어 발명가들의 노력도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시대의 사람들은 각 시대의 한글·한국어를 적극적으로 발명해냈습니다. 말도 사람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니까요.

이때 사려깊은 아마추어 발명가들은 ‘옛것’만 추구하지도, 그렇다고 반대로 ‘새것’만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생명력’이었죠. 제아무리 훌륭한 타자기를 만들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쓰지 않았다면 힘을 잃었을 테니까요. 이것은 우리말 단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언어탐식가(貪識家)’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백우진은, 그가 쓴 책 <단어의 사연들>에서 더 많은 말맛 나는 단어들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차 말도 바뀌어가는데요. 우리가 적극적으로 새로운 단어를 발굴하고 또 발명하지 않으면, 우리 손에는 쓸 만한 단어가 아주 조금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책의 서문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더 풍요로운 말을 갖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것’도 담는 단어를 발굴하고 또 발명해내야 한다고 주장하죠.

이 책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그 단어를 발굴·발명하는 일이 단순히 ‘필요하다’라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통상 우리는 ‘순화어’ ‘고유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신경쓰지 않고 무작정 세탁기에 넣어 돌려 빤 것 같은 멋없는 단어들도 많죠. 혹은 반 세기 전쯤 농어촌에서나 썼을 법한 순우리말 단어들, 원래 맥락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거나요. 이런 옛 단어들을 단지 끌어오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김수영 시인은 과거 우리말 단어와 관련된 한 산문에서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같은 낱말 속에는 하나하나 어린 시절의 역사가 스며 있고 신화가 담겨 있다”며, 하지만 “그런 것을 아무리 많이 열거해보았대야 개인적인 취미나 감상밖에는 되지 않고, 보편적인 언어미가 아닌 회고미학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고작 (…) 아름다운 우리말의 낱말은 진정한 시의 테두리 속에 살아있는 낱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어쩌면 ‘순화어(신조어 혹은 발굴된 말)나 유행어’는 영화나 음악 등과 같은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습니다. 한 해에도 수많은 영화, 음악, 책, 글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지만 그중에 정말 사람들의 마음을 때리는 것만이 생명력을 얻어 오래오래 살아남듯요. 예를 들면 수많은 순화어 가운데서도 ‘윈도 95’를 국내에 들여올 때 만들어진 순화어인 ‘바탕화면(Desktop)’ ‘바로가기(Shortcut)’ 등은 오늘날 완전히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면 말맛이 나는 단어를 잘 발굴, 발명할 수 있을까요? 저자에 따르면 항상 주위를 살피고 궁리하며, 때때로 한글 단어의 조어 원리에 관심을 갖고 원리에서 너무 어긋나진 않는, 하지만 원리에 머무르지만은 않는 금 밟기·넘기 시도를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특정 글자로 끝나는 단어들을 모아보다 보면, 그 안에서 어감과 맥락, 계통이 보이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단어를 제안할 수도 있게 되는 식으로요. 잊혀져 있던 보석 같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볼 수도 있고요.

실은, 어떤 단어가 생명력을 얻을지를 온전히 예측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어의 기본 원칙을 공부해보고 또 관심을 기울여 사전을 뒤적이고 과거의 단어를 발굴하는 등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참신하고 즐거운 단어가 거저 안방으로 굴러들어 오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좀 더 많은 사람이 오늘날에도 단어의 아마추어 발명가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고 즐겁게 도전한다면, 더 말맛 나는 재미난 단어들을 많이 얻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는 세종대왕으로부터 훌륭한 한글을 받은 후세의 의무인 동시에, 우리의 말과 글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고요.

맺음말

어떤 훌륭한 보물을 물려받더라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갖고 놀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발명가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어뿐 아니라 그 어떤 분야에서도요.

연구자님도 제 나름의 ‘아마추어 발명가’가 되어보시길,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는 기회를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연구자님이 혹시 혼자만 알기 아까운 재미난 단어를 발견, 발명하면 제게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아니면 제게 직접 알려주진 않으시더라도, 어느 물기슭에서 연구자님이 종이배를 띄우면 흘러흘러 제게도 언젠가 그 말이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스피아] 말맛 나는 우리말…‘옛것’도 ‘새것’도 갈고닦아야 살아남는다

이 글은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 싶으시다면 오른쪽 QR코드를 촬영하거나, 포털에 ‘인스피아’를 검색해서 구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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