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게 전부가 아니다···다르게 읽을 뿐

정원식 기자

읽지 못하는 사람들

매슈 루버리 지음 |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408쪽 | 2만2000원

[책과 삶]‘읽는’ 게 전부가 아니다···다르게 읽을 뿐

“글자에서 초점이 흔들릴 때마다 눈이 깜빡이는 것 같다. 책 페이지는 마치 폭풍 때문에 안테나가 흔들려 지직거리는 텔레비전 화면 같다. 페이지가 선명했다가 다시 흐려지기 때문에 띄엄띄엄 읽어야 한다.”

1994년 67세로 사망한 미국의 사회활동가 에이브러햄 슈미트가 자서전 <현명한 백치>에서 자신의 고질적 난독증을 묘사한 대목이다. 슈미트는 “단어 하나하나를 붙잡아 제자리에 묶어”두지 않으면 글자들이 서로 뒤섞여 알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 글자가 사라져버리기도 했다고 말한다.

퀸메리런던대학에서 현대문학을 가르치는 매슈 루버리가 쓴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난독증, 과독증, 실독증, 공감각, 환각, 치매 등 신경생리학적 원인으로 인해 ‘읽기장벽’에 부딪힌 사람들의 독특한 경험 세계로 안내하는 책이다.

난독증 독자에게 종이에 찍힌 활자는 “움직이는 표적”이다. 글자가 뒤집혀 보이거나, 빙빙 돌거나, 희미해지거나, 크기가 제멋대로 변하는 일이 반복된다. 한 난독증 독자는 책 페이지가 “알파벳이 뒤섞인 수프 접시”로 보인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단어들이 페이지 위에서 “축축한 물감처럼” 흘러내린다고 표현했다. 글자 주변에서 후광을 보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텍스트를 놀라운 속도로 읽어치우는 과독증 독자도 있다. 자폐인 중 극소수가 이 유형에 속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스웨덴 작가 구닐라 게를란드는 아무리 긴 글도 술술 외울 수 있다. 자서전에서 그는 “시험 때는 머릿속에서 맞는 페이지를 찾아 그냥 거기 있는 내용을 읽었다”면서 “무슨 내용이 있는지는 기억하지 않지만 머릿속에 페이지 복사본을 저장해두고 거기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고 썼다. 책을 사진처럼 찍어서 기억할 수 있는 ‘사진기억’을 가진 그에게 독서는 ‘검색’과 다를 바 없다.

책의 물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들도 있다. “책을 알파벳순으로 나열하고, 쪽수를 세거나 종이를 팔랑팔랑 넘기고, 책 뒤에 숨거나 책을 담요로 덮기도 하며, 책을 던지고 찢고 자르기도 한다.” 2010년 39세로 사망한 저기능 자폐인 멜 백스는 책을 맛보고 책의 냄새를 맡았다. ‘내 언어로(In My Language)’라는 제목의 8분30초짜리 유튜브 영상을 보면 얼굴 전체를 책에 문지르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과독증을 가진 이들은 ‘백치 천재’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읽는 속도와 기억력은 기계를 능가하는 수준이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서는 평범한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어느 11세 소년을 연구한 미국 심리학자들은 이 소년이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줄줄 외울 수 있었지만 대통령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몰랐다고 기록했다.

말도 하고 글도 쓸 수 있지만 글을 읽을 수는 없는 순수 실독증 사례도 흥미롭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의 신경클리닉을 찾은 한 프랑스인은 사냥을 하다 다친 뒤부터 자신이 쓴 편지를 읽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톰(Tom)이라는 이름의 한 영국인은 자신의 이름에서 ‘T’를 제외한 철자는 읽지 못하면서도 ‘electricity’(전기), ‘infirmacy’(의무실) 같은 단어는 이해했다. 한 뇌졸중 생존자는 “단어의 철자를 알아보려고 할 때마다 아지랑이 속을 헤치고 나온 듯 글자가 흔들리고 모양이 바뀌었다. a로 보이던 글자가 한순간에 e로, 그다음에는 w로 보이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성인 인구의 4퍼센트는 활자를 통해 다른 감각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감각자들에게 책은 흰색 종이 위에 검은 활자가 찍힌 흑백 화면이 아니라 온갖 색깔이 춤을 추는 총천연색 무대다. 언어 능력이 탁월했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철자마다 다른 색을 봤다. 심지어 영어의 ‘a’는 오래된 나무색이지만 프랑스어의 ‘a’는 흑단색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첫 글자가 무엇이냐에 따라 단어 전체의 색깔을 다르게 인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꼴에 따라서도 다른 색을 보는 사람도 있다. 어느 대학생은 신문에서 이웃의 부고를 읽었을 때 신문 색깔이 초록색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단어에서 색을 보는 사람들은 읽는 행위가 식도락의 향연인 사람들의 사례와 비교하면 오히려 평범한 수준이다. “TD라는 대학생은 ‘회장’이라는 단어에서 설탕에 절인 체리 맛이 나고, ‘암시적’이라는 단어에서는 이탈리안 드레싱을 끼얹은 양상추샐러드 맛이, ‘참석자’라는 단어에서는 새콤달콤한 소스에 찍어 먹는 치킨너깃 맛이 난다고 했다.” 어느 여성은 “리처드라는 단어는 초콜릿바 맛이 나고 혀끝에서 따뜻하게 녹아요”라고 말했다. 어느 사업가는 ‘완벽한’이란 단어에서는 귤맛을 느끼지만 ‘여섯’이라는 단어에서는 구토를 느꼈다.

책에는 글자에 인격을 부여하는 ‘과잉정신화’ 사례도 소개된다. 1891년 미국 최초의 심리학연구소를 설립한 메리 휘튼 칼킨스가 진행했던 실험에서 한 참가자는 “K는 젊은 여성이고 L의 친구입니다. M의 딸이고요. N은 M의 언니인 이모고 O는 M의 조카인 젊은 남성”이라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보이는 텍스트가 나타나는 환각 증상을 경험한다. 샤를보네증후군(시력장애가 있는 환자가 뇌의 시각 경로가 손상되어 환시를 보는 질환)이 있는 사람들 중 약 25퍼센트가 이 같은 증상을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78세 노인은 뇌졸중에서 회복된 후 벽에서 “생선 먹지 마시오” “알약 먹지 마시오” “그들이 당신 돈을 가져간다”는 등의 문장이 나타나는 현상을 경험했다.

저자는 책에서 소개한 다양한 사례들에 대해 ‘읽기장애’가 아닌 ‘신경다양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능력의 결핍이나 손상으로 인해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뇌 조직화 과정의 차이 때문에 ‘다르게 읽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책을 겉으로만 읽는 척할 뿐 깊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폐인의 책읽기에서도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교육학자 라인 홀리데이 윌리는 자서전 <정상인 척하기>에서 “나는 흰 종이에 깔끔하게 인쇄된 검은 글씨에서 실로 위안을 얻었다”고 말한다. 쉼표 앞에서는 문장을 쉬고 구두점 앞에서는 문장을 끝내는 규칙성이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올바른 읽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전형적인 독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책을 읽는 수많은 독자가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모든 독자는 비전형적이다.”

신경생리학적 장애를 지닌 이들의 사례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의 저작들을 떠올리게 한다. 직접 경험한 임상사례들을 소설처럼 재구성한 색스의 저작들과 달리 루버리는 관련 문헌들에서 찾아낸 사례들을 다소 평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현대문학 전공자인 저자가 이 사례들에 좀더 흡입력 있는 이야기의 옷을 입혔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과 삶]‘읽는’ 게 전부가 아니다···다르게 읽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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