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력’은 죽었다···‘퍼즐’ 맞추기로 전락한 수능

정원식 기자

수능 해킹

문호진·단요 지음 | 창비 | 504쪽 | 2만3000원

<수능 해킹> 공저자 문호진씨가 지난 26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수능 해킹> 공저자 문호진씨가 지난 26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교육부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 26일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의사이자 교육평론가 문호진씨(34)는 사교육 문제 해결을 위해 교육 당국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교육부가 최근 사교육의 실상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섣부른 정책으로 역효과만 발생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2010년대 이후 수능과 사교육은 지각 변동 수준의 변화를 겪으며 그 이전과 질적으로 달라졌다. <수능 해킹>은 그가 소설가 단요와 함께 지난 10여년 간 벌어진 그 변화의 실체를 해부한 책이다.

문씨는 실전모의고사의 원조격인 <포카칩 모의평가 수리 가·나형>의 출제자로 참여한 경험이 있다. 단요 작가는 실전모의고사 비문학 문제를 출제했고, 단과학원 운영에 참여한 경험도 있다.

책에서 저자들은 사교육 현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경험과 사교육 업계 종사자·학생·현직 교사에 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의 경각심을 촉구하고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지금의 수능은 ‘사고력 중심 학력 평가’라는 도입 취지에서 크게 벗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학력고사 스타일의 암기형 시험으로 퇴행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수능 문제는 도입 초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예컨대 2022년 학년도 수능에선 ‘헤겔 미학’ 관련 내용이 등장해 충격을 주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해당 문제의 정답률이 45%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전공자들도 까다롭게 여기는 헤겔 철학을 수험생들이 어떻게 이해했을까. 저자들은 이 문제를 푸는 데 필요했던 건 헤겔 미학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지문과 선지를 재빨리 훑어서 중복되는 키워드를 찾아내는 테크닉이었다고 지적한다.

평가원은 난이도 논란으로 역대 평가원장들이 줄줄이 중도 사퇴하는 사태를 겪으면서 난이도 조절에 나섰다. 수단은 문제의 패턴화·정형화였다. 그 결과 난이도 관련 논란은 잦아들었으나, 정형화 경향이 누적되면서 수능 자체는 패턴만 알면 문제를 해킹할 수 있는 ‘퍼즐’로 변했다. 저자들은 “2020년대 수능은 원리 위주의 공부를 우직하게 밀고 나가면 손해를 보는 시험”이라면서 “최적의 공략법이 있는 게임처럼, 혹은 최선의 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 도박처럼 대할수록 큰보상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평가원은 난이도 조절을 위해 퍼즐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사교육은 이에 대응하는 새로운 공략법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사교육 의존도는 계속해서 높아진다. 한 재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기출문제에 대한 풀이는 학교에서도 배울 수 있지만, 솔직히 그것만으로 제한시간 30분 안에 20문항을 해결해야 하는 수능을 풀 수 있나 싶어요. 선생님들도 시간제한을 고려해서 풀이를 해주시는 것 같지 않거든요. (중략) 단과 학원의 스킬 없이 지금 수능 과탐 1등급을 받을 수 있나 생각하면 저는 회의적이에요.”

여기에 2014학년도를 기점으로 탐구영역이 4과목에서 2과목으로 줄어들고 2018학년도를 기점으로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뀌면서 과학탐구 같은 특정 영역에서 학원 강사들이 제공하는 테크닉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덕분에 2010년대 중반 당시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이 말했던 ‘사교육의 종말’은 기우가 됐다.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참고서와 문제집 정도가 전부였던 수능 콘텐츠 시장은 2010년대 이후 크게 팽창했다. 기폭제가 된 것은 2000년 말 출범한 인터넷 수험생 커뮤니티 ‘오르비’다. 이 사이트에서 시험 정보와 노하우를 공유하며 수능을 치른 대학생들은 오르비 운영진으로부터 인세를 받고 교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대형 학원에서도 이 같은 방식을 차용하면서 현재는 사교육계의 ‘유명 출제팀’은 일타 강사나 현직 교사가 아니라 20대 초반의 N수생들 또는 대학생들이다. 저자들은 특히 수학 문제를 설계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지적 유희라면서 “N수생이나 대학생도 혼자서 모의고사 한 세트를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모의고사가 시중 교재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수능 교재 개발·판매에서 대형 출판사가 갖고 있던 헤게모니는 독립 출제팀 및 시대인재학원 등 사교육 기업으로 넘어갔다. “수험생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출제 문화가 수능 콘텐츠 문화를 만들고, 이로 인해 강사 시장과 학원가가 재편된” 것이다.

대치동으로 대표되는 사교육계는 다종다기한 수능 콘텐츠와 온·오프라인 강의를 운영하기 위해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비정규·청년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대형 학원들은 조교 및 출제·검토 업무를 병행하는 N수생들의 ‘열정 페이’가 없으면 지탱할 수 없는 구조다. 강사 조교와 출제팀으로 모두 일해봤다는 한 N수생은 강사 조교 업무를 할 때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고, 출제팀의 근로계약서는 업무 시간 일부가 노동시간에 포함되지 않는 등 불합리한 부분이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이 같은 상황을 “매년 수혈되는 수험생을 재료 삼아 N수생을 만들면서 돈까지 벌어가는 자가발전 구조”라고 비판한다.

특기할 점은 강사와 수험생의 관계가 단순히 서비스 공급자와 서비스 구매자라는 거래 관계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학 진학에서 학원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진 상황에서 강사들은 과거 교사들이 ‘교육자’로서 누리던 아우라를 띠기도 한다. 저자들은 “실제로 대다수 강사와 저자는 자신이 교육자라는 의식을 지니며 학생들을 깊이 염려”한다면서 학생들도 “학교에서 만나는 교사보다 사교육 종사자를 믿고 따르게” 된다고 지적한다.

문씨는 사교육 종사자들 중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도 있다면서도 “인격적 교류와 상업적 고려가 학생이나 강사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인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강의 진행이나 단어 채점 정도만 필요로 하던 과거와 달리 분업화되고 고도화된 사교육은 점점 더 많은 ‘젊음’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점, 수업료와 교재비 등 각종 부대비용이 급격히 오르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소득원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의 입장이 맞아떨어지는 상황은 이러한 융합을 더욱 우려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시험 성적에 낙담한 학생을 위로하는 강사의 입장과 이번 주 주간교재 풀이를 내일까지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는 고용주의 입장이 같은 채널을 통해 일어나는 겁니다.”

2019년 ‘조국 사태’ 이후 문재인 정부의 ‘정시 모집 확대’ 논란과 지난해 윤석열 정부의 ‘킬러 문항 배제’ 논란은 이 같은 입시 생태계 변화에 대한 ‘무지’가 낳은 해프닝이다. 수능이 갈수록 고도화하는 상황에서 정시 확대는 문제를 더 키울 뿐이다. ‘킬러 문항’에 대한 여권의 인식도 오류투성이었다. 지난해 김행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은 수백억원의 연봉을 받는 일타강사가 학생들에게 500만원을 받고 킬링 문항을 가르친다고 말했지만, 이는 실상과 거리가 멀다. 실제 교재 가격은 모의고사 1회당 1만원 안팎인데다 앞에서 밝힌 대로 출제자들은 N수생과 대학생들이다.

저자들은 “사교육 확대와 학생 소외의 기저에는 언제나 공교육의 무기력이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공교육의 정상화는 쉽사리 이뤄낼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문씨는 “일단 진단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책이 수립되지 않는 것”이라면서 “지금의 공교육이 처해 있는 상황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도 달라져야 한다. 저자들은 “대학들이 ‘대학 자율성’이라는 가치 뒤에 숨어 서열 경쟁에 참전하는 동안, 그 군비는 실질적으로 사회 전체에 전가”된다면서 “대학에 가장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언론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문씨는 교육과 입시에 대한 기자들의 이해가 높지 않고, 전문가들의 주장만 인용할 뿐 그러한 주장을 검증하는 과정이 없으며, 수능 이후 전년도와의 등급 커트라인 비교나 체감 난이도에만 관심을 두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책과 삶]‘사고력’은 죽었다···‘퍼즐’ 맞추기로 전락한 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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