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연극 ‘햄릿’
원작 여성혐오 지우려 성별 반전
가족 경계 넘어 정치·권력 풍자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세계문학사에서 ‘우유부단’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아버지 죽음의 진상을 파악했는데도 복수를 머뭇대고 행동을 유보한다.
지난 5일 개막한 국립극단의 <햄릿>은 조금 다르다. 극의 종반부 햄릿은 친구 호레이쇼에게 말한다. “착한 공주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악한 공주는 뭐든지 할 수 있지.” 여기서 ‘공주’는 햄릿 자신이다. 즉 이 연극에서 햄릿은 여성, 오필리어는 남성이다.
국립극단 연극에서 햄릿은 분위기를 망치는 인물이다. 왕이 사망하자 법률가를 중심으로 꾸려진 조사위원회는 죽음에 의문이 없다는 ‘합리적 결론’을 도출한다. 왕의 동생 클로디어스가 왕위를 계승하고 형수 거트루드와 결혼한다. 선왕과 거트루드 사이의 딸인 해군 장교 햄릿은 결혼식 내내 한쪽 구석에 침묵하고 앉아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친다.
아버지의 망령이 전하는 ‘비합리적’ 메시지를 통해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 살인임을 깨달은 햄릿은 복수를 계획한다. 익히 알려진 주저하는 태도 대신 미친 척하면서 복수의 야심을 용의주도하게 감추고 정의의 실현을 노린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도 다르게 들린다. 강력한 새 권력에 대한 두려움,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실망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사생결단의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말이 된다.
햄릿과 클로디어스의 갈등 못지않게 총리 폴로니어스와 ‘왕가놈들’의 충돌 역시 강조된다. 폴로니어스는 두 아들 레어티즈와 오필리어에게 내내 ‘왕가놈들’을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국가 2인자이자 대부호인 폴로니어스는 1인자로부터 언제든 ‘팽’당할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극립극단 <햄릿>은 가족 내 복수극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갈등과 비정한 생리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변한다. 합리적이고 공정하다고 여겨지지만 권력에 휘둘리거나 영합하는 법률가의 조사위원회는 세태에 대한 창작진의 인식을 보여준다. 법률가 오즈릭은 조사위원회가 “절차상 필요”할 뿐이며, 법은 “권력자가 베푸는 은혜”라고 말한다. 햄릿은 오즈릭 같은 법률가들을 “권력자들 똥구멍이나 핥는 개새끼들”이라고 저주한다.
대사도 시대상을 반영해 일부 바뀌었다. 새 권력자인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를 두고 햄릿이 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라는 대사는 “약한 자의 자리는 항상 악한 자한테 빼앗기지. (…) 악한 자여,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다시 썼다. “인간이란 얼마나 훌륭한 걸작이냐. 숭고한 이성, 무한한 능력(…). 인간은 과연 하느님을 닮았다고 할 수 있지”라는 대사는 “인간은 자기들만이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해왔어.(…) 나무가 보고 있다. 길거리 고양이가 보고 있어. (…) 인간이 벌인 일들을 다 알고 있다고. 그들도 고통을 느끼는 존재니까”로 바뀌었다.
8일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부새롬 연출가는 “작품을 제안받고 원작의 불편한 지점을 어떻게 불편하지 않게 만들 수 있을까 정진새 작가와 함께 고민했고, 그 지점 중 하나가 오래전 쓰였기에 남아있는 여성혐오였다”며 “햄릿의 성별을 바꿔보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진새 작가는 “원작에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누락됐다. 바로 ‘햄릿은 어떤 왕이 되고 싶어하는가’라는 것”이라면서 “선왕은 정복 전쟁을 통해 나라를 통치했지만, 해군 장교까지 역임해가며 국가 시스템을 이해하려 한 햄릿 공주는 다른 이상을 품었을 것이다. 햄릿을 통해 새로운 지도자의 얼굴을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연극 배우에게 햄릿 역은 선망과 부담의 대상이다. 햄릿 역의 이봉련 배우는 코로나19 확산세로 온라인으로만 관객을 만난 2021년 초연 연기로 제5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연기상을 받았다. 그는 “<햄릿>을 읽고 훈련하며 생각하는 과정은 제가 갖고 있던 편견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면서 “이 대본은 성별과 상관없이 누구나 연기할 수 있다. 누구도 햄릿을 연기할 수 있는 시대를 즐기자고 관객에게 요청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이호재,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등 원로 배우들이 조연과 단역을 맡아 화제인 신시컴퍼니의 <햄릿>도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에서 공연중이다. 10월엔 주목받는 젊은 연출가 신유청이 만드는 또다른 <햄릿>이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다. 정진새 작가는 “과거 한국 관객은 막연하게 ‘고전은 내가 느끼지 못하는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 독해력이 좋아졌다”며 “‘선진국의 교양 관객’으로서 어렵고 낯설던 작품을 누락 없이 즐기는 시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봉련 배우는 “객석은 셰익스피어 희곡 덕분에 즐거운 한 해다. 저희도 그 안에 있어서 큰 기쁨이다. 저도 공연 끝나면 즐기러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국립극단 <햄릿>은 29일까지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