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기회의 땅을 망치다

정원식 기자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

앵거스 디턴 지음 | 안현실·정성철 옮김 | 336쪽 | 한국경제신문

2011년 9월26일(현지시간) 기업의 탐욕과 사회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월가 점령’ 시위대가 뉴욕증권거래소 앞을 지나가면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연합뉴스

2011년 9월26일(현지시간) 기업의 탐욕과 사회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월가 점령’ 시위대가 뉴욕증권거래소 앞을 지나가면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연합뉴스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대학교 공공국제정책대학원 명예교수(79)는 1983년 영국에서 미국 뉴저지주로 이주했다. 뉴저지주 프린스턴대에서 교수직을 맡게 되면서 가족과 함께 거주지를 옮긴 것이다.

스코틀랜드 노동 계급 가정에서 성장한 디턴은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을 당시 그가 느꼈던 설렘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나로서는 미국에서 받는 급여가 주는 경제적 안정감이 고마울 정도였다. 나는 미국의 학자와 작가가 성취한 업적들, 그리고 미국이 특별히 이민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약속하는 부와 기회에 대해 경외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뒤 약 40년 간 미국은 ‘기회의 땅’에서 ‘불평등의 땅’으로 변모했다. 부제가 ‘한 이민자가 탐사한 불평등의 땅’인 이 책은 그동안 저자가 지켜본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그러한 불평등 확산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경제학계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담고 있다. 불평등 연구 분야 대가의 저술이지만 이론적 논의보다는 자전적 회고에 가까워 읽기에 까다롭진 않다.

2022년 기준 미국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소득 하위 50%의 소득은 전체의 14%에 불과하다. 세계은행 웹사이트 포브칼넷에 따르면 미국 내 530만명이 세계은행이 정한 글로벌 빈곤선 (1인당 일일 소득 1.90달러)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 고졸 남성의 실질 임금은 50년 전보다 낮아졌다. 자살, 약물 과다복용, 알코올성 간질환 등으로 인한 ‘절망사’는 4년제 대학 학위를 갖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증가하고 있다.

은행은 이익은 자신들이 가져가고 비용은 사회에 떠넘기기 위해 로비를 벌인다. 사모펀드는 구급차 서비스를 사들이고 병원 응급실에 자신들이 고용한 의사를 배치해 환자들의 주머니를 턴다. 미국인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의료비로 쓰는데도 의료 서비스의 투명성은 “백화점에서 눈을 가리고 쇼핑을 하는 것”에 비유될 만큼 낮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페이스북, 테슬라, 애플 등 빅테크 기업들은 ‘혁신자’에서 ‘약탈자’로 변신했다. 이들은 기술 혁신을 통해 전에 없던 편의를 제공했으나,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지금은 혁신을 지속하는 대신 “젊은 경쟁업체들이 무서운 상대가 되기 전에 인수하거나 공격적으로 특허를 매수하거나 로비 활동을 벌이거나 해서 위협을 미리 없애는 선택”을 하고 있다.

1973년 모병제 실시 이후 군대는 경제적 문제로 대학을 가지 못한 고졸자들이 “엘리트의 자녀들, 즉 사모펀드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군 복무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대신 싸워주는 곳이 됐다. 저자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복무하던 시절의 사회적 연대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심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한다.

미국이 ‘기회의 땅’에서 ‘불평등의 땅’으로 변모한 데는 경제학의 책임이 적지 않다. 주된 비판 대상은 밀턴 프리드먼(1912~2006)과 조지 스티글러(1911~1991)를 주축으로 하는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이다.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은 “돈이 복지의 유일한 척도이고, 불평등은 크게 문제가 아니며 효율성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또 “유일한 불공정은 경제를 최대의 효율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며, 재분배에는 필연적으로 손실이 따르기 때문에 정의를 앞세워 이루어지는 재분배는 본질적으로 부당하다”고 본다. 프리드먼은 불평등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더 큰 불평등을 초래할 것이라면서 모든 것을 자유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극단적인 시장만능주의는 보수적인 공화당 정권들이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가속화된 불평등 양상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도록 하는 구실이 됐다.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는 “포퓰리스트는 새로운 폭력 집단이고 갱단보다 우리를 더 위협하고 있다”면서 “트럼프는 중상주의, 즉 수입보다 수출을 더 많이 해야 부자가 된다는, 오랫동안 신뢰를 얻지 못한 도그마를 열성적으로 추종하는 지지자”라고 지적한다. 이어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지만 트럼프에게 과학 자문역이 있었다면 COVID-19 치료제로 거머리나 연금술(또는 어쩌면 표백제)을 추천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비판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반이민 정책에 대해서는 “2015년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4명 중 3명은 무슬림이 다수이거나 테러가 빈번한 국가 출신이었다”고 꼬집는다.

저자는 “현대 주류 경제학의 핵심 문제 중의 하나는 그 범위와 주제의 한계성”이라면서 “경제학은 인류 복지 연구라는 기반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말한다. 경제학자들은 “엘리트를 부유하게 하고 소득과 부를 노동에서 자본으로 재분배하며 수많은 일자리 파괴 및 지역사회 황폐화의 책임이 있는 세계화와 기술변화의 주창자 역할을 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2019년 기준으로 경제학계에서 가장 인용도가 높은 하버드대 ‘계간 경제학저널’은 기후변화 관련 논문을 게재한 적이 없다.

저자는 경제학자들이 효율성만을 강조해온 주류 경제학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정의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정부와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더욱 현실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돈이 인간 복지의 기준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사회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학자들과 더 많은 교류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때 경제학의 중심에 있었던 철학적 영역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책과 삶]경제학, 기회의 땅을 망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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