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문화유산연구소, 집터·토기 등 발굴
“성벽 쌓기 100년전 주민들 거주 가능성”
신라의 왕궁이 있던 도성(왕성) 터로 유명한 경주 월성(사적)에서 1800여년 전 사로국 시기의 취락과 의례의 흔적, 각종 토기와 의례 제물인 개의 뼈 등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사로국(斯盧國)은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이전에 존재한 진한의 12개국 중 하나이자 신라의 모체다. 박혁거세가 세웠다는 건국신화가 있는 사로국(서라벌)은 이후 주변 작은 나라들을 하나씩 통합해 내물 마립간(재위 356~402년) 당시에는 진한 전역을 거의 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지증왕(재위 500~514) 때인 503년에 나라 이름을 ‘신라’로, 최고 지배자의 호칭도 ‘왕’으로 바꿨다.
사로국 시기(기원전 1세기~서기 4세기 중엽)의 유물과 유구는 경주 황성동 등 여러 곳에서 확인됐지만 월성에서 발굴되기는 처음이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3세기 초중반 사로국 시기의 유물·유구는 신라가 월성을 쌓기 전에 사로국 시기의 주민들이 이미 거주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신라의 모태이지만 관련 자료 부족 등으로 연구가 미진한 사로국은 물론 향후 월성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라는 평가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월성 발굴조사에서 사로국 시기인 3세기대의 집자리 등 취락 양상, 개를 의례 제물로 바친 정황을 보여주는 의례 흔적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2일 밝혔다.
발굴조사 현장은 월성 A지구이자 서남쪽 성벽 인근으로 월정교 부근이다. 이 지역은 월성을 끼고 도는 남천에 접한 곳으로 연약한 지반에 모래층이 퇴적된 지형이다.
발굴조사에서는 연약한 지반을 견고하게 만들기위해 1.5m 높이로 흙을 다져 올린(성토) 것이 확인됐다. 성토 재료로는 벼의 겉껍질은 물론 조개껍데기, 각종 씨앗 등이 섞인 유기물질을 작업 공정별로 다양하게 사용했다.
또 집 자리와 함께 당시 주민들이 먹은 것으로 보이는 조개, 굴 껍데기 등도 발견됐다. 월성의 성벽이 쌓아지기 100여년 전에 이미 취락지를 만들기위한 대대적인 공사가 벌어진 것으로, 당시 사로국 주민들이 월성에 집단 거주했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연구소측은 “막대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됐을 성토 작업이 월성 성벽 축조보다 100여년 앞선 시점에 진행됐다는 점이 주목된다”며 “3세기 초중반에 연약한 지반을 견고한 대지로 만들어 거주한 이유 등 다방면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조사 결과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로국 시기의 중심지 확인 등 사로국 시기는 물론 월성의 축조와 변화 과정 등 전반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전망”이라고 덧붙였다.
월성은 <삼국사기>에는 사로국 시기인 파사왕 22년인 101년에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동안의 발굴조사 결과, 250여년 늦은 4세기 중반에 쌓기 시작해 5세기 초반에 완공된 것으로 드러났다.
사로국 시기의 취락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특별한 의례를 치른 흔적을 보여주는 유구도 확인됐다. 나무 기둥을 세워 만든 유구는 원형 구조로 직경은 6m에 이른다. 발굴조사에서는 종류별로 2~3점씩 짝을 맞춘 토기 15점이 출토됐고, 토기 위로 황색 안료를 바른 마직물을 감싼 흔적도 나타났다.
특히 1개체의 개 뼈가 온전히 발굴되고 그 주변에서도 의례용 토기들이 나와 개를 의례 제물로 바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소측은 “짧은 기간 유구를 사용한 뒤 불을 질러 폐기한 것으로 보인다”며 “비슷한 시기에 개를 의례 제물로 바친 사례는 아직까지 유일하다”고 밝혔다.
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7일 오후 월성 발굴조사 현장에서 발굴조사 성과를 일반에 공개하는 현장설명회를 연다.
이어 8일에는 경주 힐튼호텔에서 이번 조사 성과를 다양한 방면에서 논의하는 학술토론회도 개최한다. 학술토론회에서는 ‘사로국 시기 월성 취락이 제기하는 쟁점’을 주제로 한 발제와 월성 이전 취락의 조사 내용 검토, 월성 축조 이전의 세력에 대한 논의 등이 이뤄진다. 현장 설명회와 학술 토론회는 누구나 자유롭게 방문해 참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