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시기 병조참판 가문의 외아들 종려(박종민)와 몸종 천영(강동원)은 신분은 다르지만 친구로 자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능한 왕 선조(차승원)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백성들이 경복궁을 불태우는 난리통에 종려와 천영은 끔찍한 오해로 엇갈린다. 종려는 복수심에 백성을 살육하며 천영을 찾아다니고, 천영은 이름을 날리는 의병이 돼 종려와 대결한다. 왜군 무사 겐신(정성일)도 강렬한 호승심으로 이들에게 칼을 겨눈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가 2일 넷플릭스 영화 <전, 란>으로 아시아 최대 영화 축제를 여는 축포를 쏘아올렸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콘텐츠이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영화가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은 처음이다. 한국영화 거장 박찬욱 감독이 제작·각본에 참여했고, 박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미술감독 출신 김상만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전, 란>은 선조와 임진왜란을 소재로 삼았지만 전쟁이 벌어진 7년이 아니라 전쟁 전후의 시간을 다룬다. 당시 사회상보다 두 남자의 애증 관계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김상만 감독은 부감 숏(위에서 내려다보듯 촬영하는 기법)부터 스텝프린팅(피사체를 저속촬영해 잔상을 만드는 기법)까지 다양한 기법으로 영화를 꾸몄다. 큰 칼과 넓은 옷자락이 회전하는 액션은 박진감 넘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해무(海霧) 속에서 종려, 천영, 겐신이 결투를 벌이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이날 오후 열린 <전, 란> 기자회견에선 박도신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을 향해 ‘왜 OTT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정했느냐’는 취지의 질문이 세 차례 나왔다. 역대 부산영화제 개막작은 주로 시대적 메시지를 담은 극장용 독립영화들이었다. 2020년 <칠중주: 홍콩 이야기>, 2021년 <헤븐: 행복의 나라로>, 2022년 <바람의 향기>, 2023년 <한국이 싫어서>였다. OTT 콘텐츠이자 상업영화를 올해 개막작으로 선정한 이유에 관심이 쏠렸다.
박 직무대행은 “<전, 란>을 정말 재밌게 봤고 대중에게 다가가기 좋은 영화다. OTT든 아니든 꼭 관객에게 소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우리 영화제는 어디까지나 독립영화 중심이라는 점은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상만 감독은 “극장 상영이라는 조건에 반드시 일치해야만 ‘영화’인지 질문을 한번 던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영화제는 2일부터 11일까지 열흘 동안 부산 영화의전당 일대에서 63개국에서 초청한 영화 279편을 상영한다. 세계적인 스타 영화인들도 줄줄이 부산을 찾는다. 영화 <소년시절의 너> <소울메이트> 등으로 인기가 뜨거운 중국 배우 저우동위(주동우)가 ‘뉴 커런츠’ 부문 심사위원 자격으로 온다. 일본의 ‘혼밥’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로 유명한 배우 마츠시게 유타카, 청춘 스타 아리무라 카스미와 사카구치 켄타로도 레드카펫을 밟았다.
올해도 시네필의 가슴이 두근거릴 만한 프로그램이 풍성하게 마련됐다.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신작 <클라우드> <뱀의 길>을 선보인다. 지난해 홍콩 대표 배우 저우룬파(주윤발)에 이어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포르투갈의 거장 미겔 고메스 감독도 처음 한국을 찾아 직접 작품을 소개한다.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그랜드 투어>까지 장편 8편 모두가 상영된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룸 넥스트 도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도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다.
특별전 ‘고운 사람, 이선균’에선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우 이선균의 대표작 <기생충> <끝까지 간다> <우리 선희> 등을 볼 수 있다. 이선균에게는 ‘올해의 한국영화공로상’이 수여된다. 부산영화제는 11일 에릭 쿠 감독의 <영혼의 여행>으로 열흘간의 영화 축제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부산영화제는 지난해 이사장·집행위원장 사퇴로 이어진 내홍과 올해 국고보조금 삭감을 겪으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오히려 지난해(209편)보다 올해 상영작을 70편 늘렸다. 특히 개막작 <전, 란> 말고도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시즌 2, 티빙 시리즈 <좋거나 나쁜 동재>, 애플TV+ 다큐멘터리 <마지막 해녀들> 등 OTT 콘텐츠 9편을 곳곳에 배치한 점이 눈에 띈다. 한국 영화계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