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블루
감독 곤 사토시
성우 이와오 준코, 마츠모토 리카, 츠지 신파치
상영시간 81분
제작연도 1997년
영화를 사랑하고, 특히 호러 영화를 사랑하는 기자가 ‘호달달’ 떨며 즐긴 명작들을 소개합니다. 격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
곤 사토시는 1963년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태어났다. 만화가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화려한 명성을 얻었다. <천년여우>(2001) <도쿄 갓파더즈>(2003) <망상대리인>(2004) <파프리카>(2006) 등 작품마다 호평을 받았다. 일본에서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를 따지면 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름이었다. 천재는 요절한다고 했던가. 2010년 47살에 췌장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퍼펙트 블루>(1997)는 곤 사토시의 첫 애니메이션이고 유일한 호러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 키리고에 미마(이와오 준코)는 도쿄에서 여성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하지만 별로 인기가 없다. 기획사 사장 타도코로(츠지 신파치)는 미마를 억지로 배우로 전향시킨다. 미마의 매니저이자 전직 아이돌인 히카다 루미(마츠모토 리카)가 미마를 걱정하며 반대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미마는 강간당하는 연기나 누드 화보 촬영을 강요당한다. 흉측한 스토커 ‘미마니아’(오쿠라 마사아키)도 불쑥불쑥 나타난다. 미마는 자신이 출연하는 스릴러 드라마와 현실을 점점 구분하기 어려워하며 극한의 혼란에 빠진다. 어느날 미마는 누드 화보 사진가 무라노(에바라 마사시)를 송곳으로 잔인하게 죽이는 꿈을 꾼다. 그런데 다음날 무라노가 정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퍼펙트 블루>를 보면 곤 사토시의 빛나는 재능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제작비 9000만엔(약 8억원)의 저예산으로 만들어졌다. 애니메이션은 주요 장면인 원화(原畵) 사이에 들어가 움직임을 만드는 동화(動畵) 매수가 많아지면 제작비가 크게 증가한다. <퍼펙트 블루>는 저예산 때문에 동화를 많이 사용할 수가 없어 움직임이 매끄럽지 않았다. 곤 사토시는 대신 작화와 채색에 세밀하게 공을 들였고 감각적인 편집으로 ‘싼 티’를 날려버렸다. 특히 ‘점프 컷’(일부러 장면과 장면을 뚝뚝 끊어낸 편집)과 ‘매치 컷’(서로 다른 장면을 시각적으로 일치시키는 편집)을 뒤섞어 조각조각 찢어지는 미마의 정신 상태를 관객이 경험할 수 있도록 연출했다. 기존 연출 관습을 깨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미마의 방은 분명 안락해야 할 장소인데도 묘하게 강박감과 불안감이 있다. 착각이 아니라 정밀하게 설계된 느낌이다. 곤 사토시는 방 안의 컴퓨터 모니터, TV 화면, 열대어 수조 등을 일부러 4:3 비율로 그렸다. ‘미마의 방’을 모니터를 통해 들여다보는 관음자의 시선을 암시한다. 제목은 ‘퍼펙트 블루’지만 파란색보다는 빨간색을 미마의 의상과 무대 등에 사용했다. 특히 마지막 ‘가짜 미마’와의 추격전 장면에선 빨간색이 더욱 강렬하게 뇌리에 각인된다.
미마는 “당신은 누구죠?”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수차례 등장한다. 미마는 기획사 사장에게서, 누드 화보 사진가에게서, 스토커에게서, 대중에게서 타인이 욕망하는 ‘가짜 나’를 강요당하고 ‘진짜 나’를 통제당한다. 미마는 자신을 부정당하고 상실하는 공포감에 시달린다. 결국 <퍼펙트 블루>는 주인공이 타인의 욕망을 극복하고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1997년 일본 사회의 연예 산업과 성상품화를 비판한 작품이지만 2024년 한국 사회에도 통하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몽환적 연출은 <천년여우> <파프리카> 등 곤 사토시의 이후 작품에서도 이어졌다.
곤 사토시의 홈페이지에서 유언장인 ‘안녕’ 전문을 읽을 수 있다. 재치 넘치고 따뜻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명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이만 펜을 내려놓겠습니다. 자, 그럼 먼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