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영화(榮華) 뒤엔 광주의 피 고인 그늘이 있었다

백승찬 기자

장민승 감독의 ‘둥글고 둥글게’
88올림픽부터 5·18까지
“미얀마 쿠데타에 팔레스타인 침공까지…길 잃고 제자리 돌아온 기분”

<둥글고 둥글게>는 지난해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작품이지만, 88분의 상영시간 중 절반이 가까워지도록 광주는 나오지 않는다. 시작과 함께 촛불을 클로즈업해 롱테이크로 보여준 뒤, 촛불이 갑자기 꺼지면 1980년대 산업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이 나온다. 쇳물을 녹이고, 텔레비전을 조립하고, 재봉틀을 돌리는 ‘산업역군’들의 모습이다.

곧이어 1980년대 한국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88올림픽이 등장한다. 태권도 시범, 굴렁쇠 소년 등 익숙한 장면들이다. 올림픽주경기장을 가득 채운 채 환호하는 관객들이 나오더니 갑자기 현재 경기장의 모습이 삽입된다. 기하학적이며 웅장하고 텅 빈 구조물이 어딘가 음산하다.

<둥글고 둥글게>는 지난해 11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최초 공개된 뒤 상영을 이어갈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확진자 급증으로 서울 상영이 당일 취소됐다. 작품을 기획한 영상자료원은 5·18광주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은 이달 다시 상영을 준비했다. 지난 15일 서울 상암동 영상자료원에서 처음 상영했고, 오는 18일 경기아트센터, 21일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순차적으로 선보인다. 15일 상영 뒤 장민승 감독을 만났다.

<둥글고 둥글게>의 한 장면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둥글고 둥글게>의 한 장면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둥글고 둥글게 포스터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둥글고 둥글게 포스터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장 감독은 “5·18에 대한 유언비어·조롱·혐오가 난무하고 분열·갈등이 일어나는 시대”라며 “이에 대해 명확히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장 감독은 5·18에 곧바로 다가가기보다는 올림픽을 시작으로 한국의 1980년대를 거슬러 올라보기로 했다. 올림픽과 경제 개발, 박종철과 이한열, 교황 방한과 삼청교육대, 전두환이 참석한 조찬기도회와 고속도로 준공식 관련 영상이 빠르게 흘러간다. 이어 ‘광주는 평정됐다’는 정부 발표가 음성으로, 거리를 청소하거나 등교하며 일상을 되찾은 광주 시민들 모습이 영상으로 나온다. 시간을 조금씩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의 다음 장면이 무엇인지 모두가 안다.

영상은 다시 한숨 고른다.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십니까? 어찌하여 환난의 때에 숨어 계십니까?”라는 시편 10장 1절 구절이 세로로 흐른다. 장 감독은 “광주 일을 하다가 문득 시편을 읽었는데, 마치 하느님한테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상소문처럼 들렸다”며 “계엄군이 나를 짓이기고 각목으로 내리친다면 어떤 말보다 시편이 떠오를 것 같았다. 억울한 일들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온갖 삶의 현장에서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작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은 흑백이 뒤바뀐 네거티브로 나타난다. 광주에 대해 잘 알려진 이미지들이지만, 네거티브로 화면을 채우니 낯설고 섬찟하다. 사회질서, 경제발전, 올림픽 같은 1980년대 영화(榮華)들의 근원을 찾아가면 광주라는 피 고인 그늘이 있음을 시각적·시간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폐허가 된 구 광주교도소, 구 국군광주병원의 복도를 유령처럼 떠돈다. 이곳을 거쳐갔던 희생자들이 기억하듯, 시위 당시 모습이 간간이 틈입한다. 장 감독의 오랜 친구인 정재일 음악감독이 작곡한 그레고리안 성가 스타일의 합창단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고조된다. ‘메모라레(memorare)’, 라틴어로 ‘기억하라’는 가사다. 1980년대 한국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구였던 <둥글고 둥글게>는 이제 광주에 대한 추도시가 된다.

<둥글고 둥글게>의 한 장면.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은 네거티브로 표현됐다.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둥글고 둥글게>의 한 장면.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은 네거티브로 표현됐다.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둥글고 둥글게> 속 옛 국군광주병원의 모습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둥글고 둥글게> 속 옛 국군광주병원의 모습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둥글고 둥글게>의 한 장면.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은 네거티브로 표현됐다.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둥글고 둥글게>의 한 장면.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은 네거티브로 표현됐다.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장 감독은 작품을 준비하면서 극영화, 다큐멘터리, 연극, 뉴스 등 광주에 대한 많은 자료를 찾아봤다. 그중에는 부친인 장선우 감독이 연출한 <꽃잎>(1996)도 있었다. 1980년 광주를 소재로 한 최초의 상업영화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하지만 장 감독은 “과장된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내게 와닿지 않았다”며 “정부가 대놓고 가짜뉴스를 만드는 등 다양한 폭력을 구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말했다.

‘둥글고 둥글게’라는 제목은 복합적이다. 시각적으로는 88올림픽 당시의 원형 매스게임, 민주광장 분수대를 둘러싼 시위대가 겹친다. 장 감독은 “‘둥글게 살자’는 행동을 강요받던 시대” “광주와 유사한 미얀마 쿠데타, 냉전 이후의 미·중 갈등,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등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사건들” “산에서 쉬지 않고 걸었는데 길 잃고 제자리에 돌아온 기분” 등을 담았다고 이야기했다.

장 감독은 음악, 가구 디자인, 사진, 영상 등 다방면에서 활약해온 아티스트다. <둥글고 둥글게> 역시 ‘영화’라는 범주에 갇히지 않는 ‘공연융합영상 프로젝트’를 지향한다. 공연 시설이 갖춰진 장소에서 열리는 18일, 21일 상영에서는 영상이 잠시 멈춘 뒤 조명을 활용한 퍼포먼스도 준비돼 있다. 장 감독은 “<둥글고 둥글게>의 키워드는 부재(不在)다. 퍼포머가 없는 퍼포먼스도 그런 의미”라고 말했다.

<둥글고 둥글게>의 빛을 활용한 퍼포먼스. 영상이 잠시 꺼진 뒤 미리 설치된 조명의 빛이 서서히 무대에 내려온다.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둥글고 둥글게>의 빛을 활용한 퍼포먼스. 영상이 잠시 꺼진 뒤 미리 설치된 조명의 빛이 서서히 무대에 내려온다.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장민승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장민승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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