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에게도 '순정'이...'007 노 타임 투 다이'읽음

백승찬 기자

대니얼 크레이그의 마지막 본드 영화

29일 한국서 세계 최초 개봉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한 장면.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 오른쪽)는 자신의 007 코드명을 이어받은 노미(라샤나 린치)와 함께 임무를 수행한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한 장면.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 오른쪽)는 자신의 007 코드명을 이어받은 노미(라샤나 린치)와 함께 임무를 수행한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국가안보를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첩보원 007 제임스 본드의 과거 행동은 악당에 가까웠다. ‘살인면허’를 보유한 그는 사람을 죽이고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태도도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지탄의 대상이 될 법하다.

대니얼 크레이그(53)가 주연을 맡은 <007 카지노 로얄>(2006)부터 007의 성격은 조금씩 바뀌었다. 본드는 싸우면서 다쳤고 때로 살인에 대한 죄책감도 느꼈다. 부모, 연인 등과의 연이 전혀 없는, 인간관계의 진공 속에 사는 것처럼 묘사됐던 본드에게도 가족 서사가 부여되기 시작했다.

29일 한국에서 세계 최초 개봉한 <007 노 타임 투 다이>(감독 캐리 후쿠나가)는 크레이그의 다섯번째 본드 영화이자 마지막 본드 영화다. 아울러 크레이그의 본드 영화 중 가장 감상적이기도 하다. 때로 액션, 스릴러가 아니라 멜로, 가족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63분의 상영시간 동안 007 영화 특유의 액션과 본드의 정서적 격동이 균형있게 맞물렸다.

본드는 은퇴 후 연인 매들린(레아 세이두)과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본드의 여유는 오래가지 않는다. 본드는 과거 자신과 대립했던 악의 조직 스펙터 손에 거의 죽을 뻔한 뒤 매들린이 정보를 유출했다고 의심하며 그녀와 헤어진다. 5년 뒤, 홀로 유유자적하던 본드에게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일을 부탁한다. 본드 은퇴 뒤 영국 대외정보국(MI6)에서 007이라는 코드명을 이어받은 첩보원 2년 경력의 흑인 여성 노미(라샤나 린치)도 같은 표적을 쫓는다. 전 직장 후배와 충돌하며 쫓은 표적 사핀(레미 말렉)은 애증의 연인 매들린과 연관돼 있었다. 본드는 매들린과 어색하게 재회한다. 사핀은 가공할 생화학 무기를 손에 넣고 인류를 위협한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악당 사핀 역은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 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레미 말렉이 맡았다. |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악당 사핀 역은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 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레미 말렉이 맡았다. |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오랜 시간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은밀하게 일했고 그 과정에서 손에 피를 묻힌 본드는 동화 속 공주·왕자처럼 ‘그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서사를 얻지 못한다. 본드는 이탈리아의 한적한 시골에서 연인과 드라이브하며 “빨리 갈 필요 없어. 시간은 많아”라고 말하면서도, 길을 걸을 때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매들린은 본능적으로 추적자를 걱정하는 본드를 가볍게 놀리지만, 매들린 역시 과거의 그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본드는 직업적인 의심의 습관, 벼랑 끝에 섰을 때의 생존 본능을 가진 남자다. 이러한 인생 이력은 본드에게 사랑하는 가정을 꾸릴 기회를 주지 않지만, 본드가 매들린에게 가진 사랑의 감정만은 한결같고 진실하다. <노 타임 투 다이>는 역대 그 어느 007 시리즈보다 본드의 ‘순정’을 강하게 묘사했다. 수많은 액션 장면에도 불구하고 호쾌하기보다는 슬프다. 슬픔은 본드를 압박하는 외적 상황이 아니라 본드 내면의 감정에서 비롯됐다.

영화에서 거의 유일한 유머 코드는 본드가 은퇴했다는 설정에서 나온다. 노미는 은퇴한 직장 선배 본드에게 자신이 새로 007 번호를 부여받았다고 밝히며 “영구결번이라도 시켜줄 줄 알았냐”라고 놀린다. 본드는 오랜만에 전 직장 MI6를 찾아가서는 ‘방문자’ 출입증을 단다.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본드는 연인 매들린(레이 세이두)와 행복한 은퇴생활을 꿈꾸지만 여의치 않다. |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 본드는 연인 매들린(레이 세이두)와 행복한 은퇴생활을 꿈꾸지만 여의치 않다. |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본드 영화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신무기도 등장하지만, 마블 영화의 초능력에 비하면 팬서비스 수준이다. 크레이그가 연기한 본드 액션의 특징은 진짜 육체가 맞부딪쳐 땀이 나고 피가 흐르고 뼈가 부러지는 느낌을 준다는 데 있다. 한때 희한한 신기술로 관객을 즐겁게 했던 본드는 이제 고전적인 육체 액션의 수호자로 남았다.

구닥다리 첩보영화로 전락하고 있던 시리즈를 되살린 크레이그의 본드 역할로는 근사한 마무리가 됐다. 차기 제임스 본드를 맡을 배우는 몇 년째 ‘설’만 오갈 뿐, 여전히 미정이다. 팬데믹이 닥치기 이전에 촬영된 영화이지만, 사람 사이의 접촉으로 표적을 살상하는 무기가 등장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우연이다. 지난해 4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영향으로 수차례 미뤄진 끝에 공개됐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데니얼 크레이그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본드 역할 영화다. |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데니얼 크레이그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본드 역할 영화다. |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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