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을 미국인으로 살았는데 시민권이 없다니··· 입양인의 이야기 ‘푸른 호수’

백승찬 기자

“자장 자장 우리 아가”로 시작하는 한국어 자장가가 나오면서 영화 <푸른 호수>(감독 저스틴 전)는 시작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안토니오 르블랑(저스틴 전)은 3세 때 미국으로 입양돼 30여년간 미국인으로 살아왔다. 뉴올리언스에서 타투이스트로 일하는 그는 좀 더 안정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자동차 정비업에 취직하려 하지만, 인종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 과거의 전과 기록 때문에 여의치 않다.

안토니오는 임신한 부인 캐시(알리시아 비칸데르), 캐시가 전 남편 에이스(마크 오브라이언)와 사이에 낳은 딸 제시(시드니 코왈스키)와 함께 가족을 이뤄 살아간다. 풍족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상은 이들 세 가족이 동네 마트에서 우연히 에이스를 만나면서 흔들린다. 경찰인 에이스의 동료가 에이스를 위한답시고 안토니오에게 시비를 건 뒤 그를 체포한다. 난데없이 이민단속국에 넘겨진 안토니오는 자신에게 미국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연고가 없는 한국으로 추방될 수도 있다.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안토니오는 다시 범죄에 손을 담근다.

<푸른 호수>는 세살 때 미국에 입양돼 30년간 살았지만, 입양과 파양을 거듭하는 사이 자신이 미국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민단속국에 단속된 뒤에야 알게 된 한인 입양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푸른 호수>는 세살 때 미국에 입양돼 30년간 살았지만, 입양과 파양을 거듭하는 사이 자신이 미국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민단속국에 단속된 뒤에야 알게 된 한인 입양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영화 <푸른 호수> 속 한인 입양인 안토니오 르블랑(왼쪽)은 전 남편과 사이에 임신을 한 백인 여성 캐시와 결혼을 한다. |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영화 <푸른 호수> 속 한인 입양인 안토니오 르블랑(왼쪽)은 전 남편과 사이에 임신을 한 백인 여성 캐시와 결혼을 한다. | 유니버설 픽처스 제공

안토니오의 복잡한 정체성은 다인종 이민자로 구성된 미국 사회의 모습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르블랑(‘백인’의 프랑스어 표현)이라는 성은 동아시아인의 전형과 같은 얼굴과 충돌한다. 많은 이들이 ‘어쩌다 그런 성을 갖게 됐나’라고 물어본다. 부인 캐시, 딸 제시는 백인이다. 역시 많은 이들이 르블랑 가족의 인종 구성을 의아하게 여긴다. 안토니오가 캐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시에게 얼마나 좋은 아빠인지는 안중에 없다. 오랜 과거의 전과, 드러나는 신체 부위에 그려진 타투 등은 안토니오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안토니오는 입양과 파양을 거듭하며 성장했다. 미국 사회 주류에 자리잡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눈치도 아니다. 안토니오는 우연히 만난 베트남 난민 출신 파커(린단팜)를 통해 자신의 뿌리를 생각한다. 파커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을지언정, 베트남인 공동체 속에서 행복해 보인다. 파커는 수련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수련은 물 위에 떠다니는 듯 보이지만 사실 뿌리가 있다. 파커는 말한다. “뿌리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미국 내에는 양부모의 무관심 속에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 못해 사소한 잘못으로도 추방 위기에 처하는 입양인들이 수만명에 달한다.   |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미국 내에는 양부모의 무관심 속에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 못해 사소한 잘못으로도 추방 위기에 처하는 입양인들이 수만명에 달한다. |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미국 정부는 2000년 외국 태생 입양인에게 시민권을 자동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소급 적용은 되지 않는다. 양부모의 무관심 속에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 못한 수만명의 입양인들은 사소한 잘못으로도 추방될 수 있다. <푸른 호수>는 추방당했거나 추방 위기에 놓인 입양인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끝난다.

심술궂은 악당이 안토니오를 방해하고, 안토니오가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질 위기에 놓이는 종반부 흐름은 관객의 눈물샘을 한껏 자극한다. 이민자의 고통을 비교적 담담하게 표현한 <미나리>와 다른 지점이다. 이 영화는 특정 한인 입양인 당사자의 사연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의 사전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국 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국계 미국인 저스틴 전이 연출, 주연, 각본을 겸했다. 지난 7월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처음 공개됐고, 지난 9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됐다. 13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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