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로 간 페미니스트 감독, 비밀스러운 ‘남성의 세계’를 파헤치다

백승찬 기자

리뷰 - 영화 ‘파워 오브 도그’

서부로 간 페미니스트 감독, 비밀스러운 ‘남성의 세계’를 파헤치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에서 로즈(위 사진)는 결혼 후 나날이 쇠약해진다. 로즈의 아주버님인 필이 그 원인이다.   넷플릭스 제공

영화 <파워 오브 도그>에서 로즈(위 사진)는 결혼 후 나날이 쇠약해진다. 로즈의 아주버님인 필이 그 원인이다. 넷플릭스 제공

제인 캠피언 12년 만의 장편 영화
이상적 남성성 향한 나르시시즘에
압도당해 쇠약해지는 여성 그려

1925년 미국 몬태나주의 대목장. 똑똑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형과 유순하고 점잖은 동생이 목장을 이끈다. 형은 카우보이 공동체의 우두머리도 겸한다. 어느 날 동생이 한 과부에게 반해 결혼한다. 과부에겐 전남편과의 사이에 둔 유약한 아들까지 있다. 형은 제수를 적대한다.

<파워 오브 도그>(원제 The Power of the Dog)는 제인 캠피언 감독이 <브라이트 스타> 이후 12년 만에 내놓은 장편 영화다. 올해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캠피언에게 은사자상(감독상)을 안기며 환영했다.

1993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피아노>에서 보여줬듯, 캠피언은 꾸준히 페미니즘 관점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대부분 영화에서 여성이 주인공이었다. <파워 오브 도그>는 다르다. 형 필(베네딕트 컴버배치)을 중심에 두고 영화가 전개된다. 필의 대체로 기묘하고 가끔 매혹적인 남성성이 영화 분위기를 좌우한다. 이 남성성은 어떤 이에겐 유독하다. 필이 같은 공간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수 로즈(커스틴 던스트)는 숨이 막힌다. 로즈에겐 도망칠 곳도 없다. 로즈는 도시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아들 피터(코디 스밋 맥피), 다정하지만 어수룩한 남편 조지(제시 플레먼스), 그리고 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세심하게 보지 않는다면 로즈의 심신이 파괴돼 가는 이유를 알기 어렵다. 필은 로즈를 노골적으로 괴롭히거나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캠피언은 저택을 압도하는 필의 존재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했다. 나무로 된 마루를 저벅저벅 걸어가는 필의 발소리가 크게 강조됐다. 로즈가 서툴게 피아노 연습을 할 때 필이 벤조로 그 곡조를 그대로 따라 하는 장면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로즈를 짓누르는 필의 분위기를 컴버배치는 탁월하게 연기했다. 컴버배치는 이 연기로 내년 아카데미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거론되고 있다.

필은 여자가 필요 없는, 남성들의 자족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라면 아내를 맞아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이 당연히 여겨지는 시대였겠지만, 필은 동생이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내비친다. 결혼 상대의 신분이 자신들보다 낮아서가 아니라, 형제와 카우보이 공동체가 충분히 완벽하기 때문이다. 필은 예일대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엘리트로 묘사된다. 필은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잘 빚어진 육체를 뽐내는 남성들의 사진을 남몰래 간직한다. 이상적인 남성성을 향한 필의 나르시시즘에는 여성이 끼어들 공간이 없다.

로즈의 앙상하고 구부정한 아들 피터는 카우보이 집단의 손쉬운 놀림거리가 된다. 필 역시 처음엔 피터를 조롱하다가 어느 순간 피터에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음을 감지한다. 필은 피터를 자기 집단으로 받아들이려 하지만, 피터 역시 필의 반대편에서 미스터리하면서 유독한 남성성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난 17일 소규모로 개봉한 <파워 오브 도그>는 이달 초 개봉한 <퍼스트 카우>와 함께 또 하나의 대안적 서부극 수작으로 기록될 것이다. <파워 오브 도그>는 다음달 1일 넷플릭스에서도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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