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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님이 매니저님 닮아서 키 크면 여자들한테 인기 많겠다”는 말에 “내 아들 게이인데”라고 답하는 엄마가 있다. 27년차 항공사 승무원 강선화씨(52)이다. 직장에서 휴가를 신고하면서 사유란에 “자녀 성별 정정으로 법원 출석”이라고 적는 엄마가 있다. 34년차 소방공무원 정은애씨(58)이다. 연분홍치마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의 주인공인 이들은 각각 5년 전과 4년 전, 자식으로부터 커밍아웃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 “나는 성소수자의 부모”라고 커밍아웃하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 동작구 독립영화관 아트나인에서 강씨, 정씨와 변규리 감독을 만났다.

비비안(성소수자 부모모임 활동명)은 27년차 항공승무원 나비(활동명)는 34년차의 베테랑 소방공무원이다. 성소수자 자녀와 엄마가 좌충우돌하며 서로 믿고 이해해나가는 과정은 매끄럽지 않지만, 서로를 단단하게 이어주고 성장시켰다. 엣나인필름 제공

비비안(성소수자 부모모임 활동명)은 27년차 항공승무원 나비(활동명)는 34년차의 베테랑 소방공무원이다. 성소수자 자녀와 엄마가 좌충우돌하며 서로 믿고 이해해나가는 과정은 매끄럽지 않지만, 서로를 단단하게 이어주고 성장시켰다. 엣나인필름 제공

강씨는 스물여섯 살 게이 아들 예준을 뒀다. 예준은 5년 전, 편지와 책을 강씨 앞에 놓으며 ‘읽어보라’고 말한 뒤 집을 떠났다. 편지는 “나는 동성애자입니다”로 시작했다. 책은 성소수자부모모임(부모모임)에서 낸 인터뷰집 <나는 성소수자의 부모입니다>였다. 정씨는 자식 한결이 어릴 때부터 레즈비언인 줄 알았다. 여자친구들에게 더 관심이 많아보였기 때문이다. 어느날 한결이 부모모임에 함께 나가자고 했다. 정씨는 “저는 레즈비언 딸 한결의 엄마입니다”라고 소개했다. 한결은 “방금 엄마는 저를 레즈비언으로 소개했는데, 사실 저는 트랜스젠더입니다”라고 말했다.

두 엄마는 모두 당황했다. 강씨는 며칠을 울다 잠들었다. 정씨는 성별 정정이 걱정이었다. 두 사람은 공부를 시작했다. 게이라는 정체성은 바꿀 수 없는 것이구나. 성별 정정 수술을 국내에서도 받을 수 있구나. 자식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 부모모임에 나가 경험과 조언을 주고받았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사소한 행동 하나, 무심코 던진 질문 하나가 당사자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일상뿐 아니라 고용, 정책 등 모든 면에서 차별은 공고했다. 성소수자 인권 활동을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을 연출한 변규리 감독과 주인공 나비(왼쪽), 비비안(오른쪽). 우철훈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을 연출한 변규리 감독과 주인공 나비(왼쪽), 비비안(오른쪽). 우철훈 선임기자

강씨와 정씨는 자식들에게 누구보다 든든한 앨라이(ally,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이다. 퀴어문화축제에도 참여하고, 동성 파트너십 제도 마련를 위한 기자회견에서 발언도 한다. 그러나 꼭 자식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자신이 성소수자 부모로서 솔직하고 당당하게 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실제로 부모모임에는 자녀들의 반대에도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이 있다. 정씨는 “그분들과 마찬가지로, 내 아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스스로 성소수자 부모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너에게 가는 길>이 퀴어영화, 가족영화이면서 동시에 여성영화이기도 한 이유다. 두 여성이 새로운 세계를 만나 스스로 성장한다. 영화는 직장에서 일하는 두 여성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변 감독은 “이분들이 성소수자 부모로 영화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 온 여성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미디어에서 전형적으로 ‘엄마’를 조명할 때 쓰는, 밥을 하거나 집안일을 하는 장면이 아닌 다양한 모습을 비추고자 했다”고 말했다.

성소수자 부모로 사는 일이 순탄치만은 않다. 정씨는 상급자로부터 “엄마가 자꾸 밖으로 나도니까 자식이 트랜스젠더가 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들었다. 강씨가 예준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리자, 어떤 가족은 교회에 나가 전환치료(동성애·양성애자를 이성애자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치료)를 받아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차별과 싸우는 이들의 유머는 빛난다. 법적 성별 정정 결정 심리를 앞둔 한결이 “판사가 그냥 레즈비언으로 살라고 하면 어떡하지?”라고 묻자, 정씨는 “네가 뭔데 레즈비언으로 살라 마라야. 해줘 이 새끼야!”라고 말할 거라고 농담한다. 앳나인필름

차별과 싸우는 이들의 유머는 빛난다. 법적 성별 정정 결정 심리를 앞둔 한결이 “판사가 그냥 레즈비언으로 살라고 하면 어떡하지?”라고 묻자, 정씨는 “네가 뭔데 레즈비언으로 살라 마라야. 해줘 이 새끼야!”라고 말할 거라고 농담한다. 앳나인필름

영화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차별과 싸우는 이들의 유머는 더욱 빛난다. 한결의 법적 성별 정정 결정 심리를 앞두고, 한결이 “판사가 그냥 레즈비언으로 살라고 하면 어떡하지?”라고 묻자, 정씨는 “네가 뭔데 레즈비언으로 살라 마라야. (성별정정 결정)해줘 이 새끼야!”라고 말할 거라고 농담한다. 강씨는 “성소수자 부모라는 정체성, 내 아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마냥 슬픈 일은 아니다”라며 “그것을 깨달아가는 모습이 영화에 담겨서 가벼움이 전해졌던 것 같다”고 했다.

성소수자 부모를 마냥 대단하거나 안쓰럽게 보는 시선도 이들은 거부했다. 강씨는 “누가 어디서 상 받거나 방송에 나오면 ‘저 그거 봤어요. 축하해요’라고 말할텐데, 제가 퀴어문화축제에 가서 부모로서 인터뷰하고 한 게 방송에 나가도 먼저 그걸 봤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주변에 한 명도 없다”고 했다. 정씨도 “‘대단하시다’ ‘힘들겠다’ 위로하는 반응이 대다수인 것 같다. 성소수자 부모로 살기 힘들지 않은 세상을 만들려고 애쓰는 활동이 신날 수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강씨는 “아이의 커밍아웃은 내게 선물”이라고 했다. 성소수자 사이에 부모에게 커밍아웃 하는 일은 ‘산’이나 ‘폭탄’에 비유된다. 그만큼 어렵고, 관계를 파탄낼 위험이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강씨는 당사자들이 부담과 죄책감을 덜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저도 이제 직장생활을 30년 했으니까 앞으로 조금밖에 안 남았다. 그런데 이렇게 영화에도 나오고 바쁘게 인터뷰하고, 새로운 인생을 경험하고 있다”며 “자식의 커밍아웃 덕분이다. 성소수자들이 부모에게 불행과 고통을 안겨줄까봐 죄책감을 갖곤 하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강씨의 남편도 성소수자 부모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교사들에게 인권 강의를 하는 자격 시험을 치르는 중이다.

영화 제목인 ‘너에게 가는 길’은 자식에게 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자하는 자신에게 가는 길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앳나인필름

영화 제목인 ‘너에게 가는 길’은 자식에게 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자하는 자신에게 가는 길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앳나인필름

관계에 대해 갖고 있던 고정관념도 깨졌다. ‘게이 사위, 레즈비언 며느리가 생겨도 좋냐’는 문구는 성소수자 혐오 집회에서 자주 발견된다. 강씨는 예준의 남자친구 성준과 성준의 어머니를 소개받았지만 사위나 사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명절에 연락을 해야한다는 등의 부담도 없다. 강씨는 “이성애 중심 가족주의의 틀을 깨고 살고 싶어졌다. (성준과 그 어머니가) 만나서 반갑고, 보면 인사하고 그러면 된다는 생각”이라며 “성준도 아들의 애인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좋은 사람을 한 명 더 만났다는 생각으로 대하고 있다”고 했다.

부모로서의 위치도 돌아봤다. 강씨는 “그동안 스스로 권위적인 부모가 아니라고, 내 자식은 무슨 얘기든지 내게 편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예준이 7년동안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며 힘든 시간을 혼자 보내도록 내버려뒀다”며 “부모로서 자신을 되돌아봤다. 어쨌든 ‘갑’의 위치에서 ‘내가 너희에게 평등함을 준다’는 태도로 아이들을 대해왔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자식이 신이 내린 선물이면, 퀴어 자식들은 한정판 선물”이라고 부모모임 회원들은 말하곤 한다. 정씨는 “다시 생각해도 한결은 신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영화 제목인 ‘너에게 가는 길’은 자식에게 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자하는 자신에게 가는 길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했다.

너에게 가는길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공

너에게 가는길 포스터. 엣나인필름 제공

다만 정씨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 성소수자에게 든든한 가족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갇히지는 않기를 강조했다. 그는 “부모는 자식을 선택할 수 있지만,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커밍아웃할 때 나를 받아주지 않는 부모는 좋은 부모가 아니니 버려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영화에서 “가족들이 지지해 준다면, 다복하다.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 또한 다행이다, 더 단단하게 자랄 수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자신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본인의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두 사람은 연달아 인터뷰를 하고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뭐라도 도움이 돼서 다행이다. 악플을 받아도 괜찮다. 더 얘기만 될 수 있다면.” 정씨는 말했다. 차별금지법 때문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민동의청원이 지난 6월 10만명의 동의를 얻어 국회에 회부됐다. 그러나 심사는 계속 미뤄지고 있다.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 9일 이 청원의 심사기한을 21대 국회 마지막 날인 2024년 5월29일까지 연장하기로 의결했다. 정씨는 “누구나 차별을 당한다. 지역, 성별, 외모 등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다”며 “스스로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이 관심 가져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경민 기자 5k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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