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만. 젠

학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 가수 지망생이 한 일

백승찬 기자

디자이너의 꿈을 꾸는 엘리(토마신 매켄지)는 영국 런던의 패션학교에 입학한다. 엘리는 어머니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은 아픔을 갖고 있다. 시골에 살던 엘리는 기숙사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작은 자취방을 구한다. 엘리는 밤에 잠들었다가 별안간 1960년대 런던 번화가 소호에서 깨어난다. 그곳에서 엘리는 가수지망생 샌디(안야 테일러 조이)가 된다. 유명 클럽의 실력자 잭(맷 스미스)은 샌디를 돕는 듯하더니, 금세 본색을 드러내 샌디를 착취한다. 샌디와 엘리는 조금씩 피폐해진다.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21세기의 엘리는 밤마다 1960년대의 샌디가 된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21세기의 엘리는 밤마다 1960년대의 샌디가 된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1일 개봉한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요란한 영화다. 이경미 감독은 “카메라가 춤을 춘다”고 표현했다. <아가씨>의 정정훈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아 눈이 쉴 틈 없는 현란한 영상을 보여준다. 패션과 음악이 폭발했던 1960년대 소호의 분위기를 꿈인 듯 현실인 듯 몽롱하게 담아냈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베이비 드라이버>(2017) 등 재치있는 상업영화를 만들어온 에드거 라이트 감독이 연출했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에는 ‘지알로 영화’의 영향력이 묻어 있다. 마리오 바바, 다리오 아르젠토 등 이탈리아 감독들이 만든 공포물을 일컫는 지알로 영화는 얼굴 없는 살인마, 잔혹하고 독창적인 살해 수법, 화려한 음악, 비논리적인 전개 등의 특징을 갖는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전개 역시 종잡기 어렵다. 현란한 형식의 외피를 걷어내면 서사의 엉성한 이음새, 설정의 비합리성이 보인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퀸스 갬빗>의 안야 테일러 조이가 1960년대의 샌디 역을 맡았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퀸스 갬빗>의 안야 테일러 조이가 1960년대의 샌디 역을 맡았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엘리와 샌디가 거울을 통해 겹쳐 보인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엘리와 샌디가 거울을 통해 겹쳐 보인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엘리는 샌디의 머리 모양을 따라하는 등 조금씩 샌디의 삶에 빠져들지만, 샌디가 학대당하면서 함께 피폐해진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엘리는 샌디의 머리 모양을 따라하는 등 조금씩 샌디의 삶에 빠져들지만, 샌디가 학대당하면서 함께 피폐해진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차라리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꿈을 닮은 영화라고 보는 것이 편하다. 꿈을 두고 합리성을 따지진 않는다. 꿈속에서는 어떤 황당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사회에 갓 나오려는 젊은 여성들이 터무니없는 일을 겪는다. 가수의 꿈에 부풀어 있던 재능있고 자신만만한 샌디는 곧 냉혹하고 착취적인 현실에 부딪힌다. 기대와 달리 노출 심한 옷을 입은 백댄서로 무대에 서게 된 것은 약과다. 매니저 잭은 “이 바닥에서 뜨기 위해선 유력자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며 샌디에게 성접대를 강요한다.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안락한 공간이어야 할 샌디의 소호 자취방은 연일 성폭행이 벌어지는 범죄 현장이 된다. 희미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손길을 붙잡기에 샌디는 너무 지쳤다. 1960년대의 지나간 일도 아니다. 정확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엘리의 어머니도 고통스러운 일을 겪었고 ‘힘들다’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해 결국 죽은 것으로 설정됐다. 21세기의 엘리도 런던에 오자마자 잡아탄 택시의 운전기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한다.

엘리는 샌디의 죽음을 목격한다. 이후 반전이 있다. 반전이 말이 되든 안 되든 제작진은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이 영화는 ‘악몽’이기 때문이다. 눈 뜬 채 현실에서 악몽을 체험하는 여성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은 비밀도 아니다. 스토킹 피해에 시달리다 거주지를 옮기고 경찰에 신고하고 스마트워치를 받았는데도 결국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한 여성의 사례는 현실에서 일어난다고 상상할 수 없다.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시골에 살던 엘리는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런던으로 온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라스트 나잇 인 소호>의 한 장면. 시골에 살던 엘리는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런던으로 온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고 여성 창작자가 만들었다고 ‘여성 서사’로 부를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다시 만난 젠더’는 젠더를 다루는 기존의 틀을 깨고 주목할 만한 시도를 한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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