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스크린이 아니라도 좋은 ‘태일이’

김태훈 기자
전태일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의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제공

전태일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의 한 장면 / 리틀빅픽처스 제공

“돌아온 전태일이 묻는다. 너의 직장은 안전한가.”(이태현)

“책으로만 봤을 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다양한 장면이 애니메이션으로 자세히 표현돼 보기 좋았고, 굉장히 퀄리티 높은 작화가 마음에 들었다.”(박재정)

2018년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동창들이 중학생이 돼 오랜만에 만났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삶을 담은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를 보러 모인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하루 용돈을 모아 영화 제작 펀딩에 참여했던 이들은 그동안 더 자란 시각으로 전태일 시대, 그리고 현재의 노동현실을 바라봤다.

“짧게나마 영화를 본 소감을 말해달라고 했더니 저도 놀랄 만큼 성숙해진 시선으로 쓴 감상을 보내더라.” 3년 전 광주 광산구 풍영초교에서 이들의 담임을 맡았던 백성동 교사(현 광주 극락초교·31)도 지난 12월 4일 광주의 한 영화관에서 제자들과 만났다. 당시 4학년 6반 학생 21명 가운데 14명이 모였다. 이들이 전태일과 맺은 인연은 책 한권에서 시작됐다. “그때 책 한권을 골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읽는 3주짜리 교과 과정을 진행했는데 학생들이 여러 후보 중 위기철 작가가 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을 골랐다”는 백 교사는 수업 시간에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학생들이 좀더 다양한 현실에 눈을 뜨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수업을 마무리하며 박계현 전태일재단 이사(당시 사무총장)에게서 전태일의 삶에 관해 듣는 강연 시간도 마련했고, 내친김에 당시 제작 준비 중이던 영화 <태일이> 제작비를 모을 때도 함께 참여했다. 영화가 개봉하면 만나자던 약속은 현실이 됐다.

■전태일의 삶 담은 애니메이션 영화

지난 12월 1일 개봉한 <태일이>는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개봉 8일째인 12월 8일 현재 9만2678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관 개봉 첫날 4.8%로 시작한 상영점유율이 8일째에는 1.5%로 떨어졌지만 사실 일반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태일이>의 주무대가 아니다. 개봉 당시 확보했던 423개의 스크린 수를 8일 만에 173개로 줄일 정도로 일반 영화관의 대접이 그리 좋지 않으리란 건 이미 예상했던 바다. 대신 단체·공동체 관람이 <태일이>의 동력이 되고 있다. 영화관 개봉 전에만 5만9463명의 관객을 모은 힘이 바로 전태일의 뒤를 이은 노동·사회단체들의 꾸준한 단체관람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20일에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소속 조합원들이 전국 115곳에서 공동체상영을 진행했다. 학교 급식실 등 일하던 자리를 떠나 파업을 진행 중이던 이들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막힌 집회 현장 대신 영화를 보러 곳곳에서 모였다. “교육공무직본부 소속 조합원 대부분이 학교에서 일하는 여성 조합원들이다. 교섭이 여의치 않은 파업 중에 전태일 열사의 삶을 보게 되니 지금의 현실과 겹쳐져 상영 현장이 눈물바다가 됐다.” 조합원들과 함께 영화를 감상한 이시정 부본부장은 이들이 그저 슬퍼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며 “우리 조합원 9500여명이 영화를 봤는데 이날 인터넷에 올라온 영화 감상평을 보니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받겠다는 다짐이 여럿 눈에 띄더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소속 조합원들이 <태일이> 공동체상영 전 구호를 적은 현수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제공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소속 조합원들이 <태일이> 공동체상영 전 구호를 적은 현수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제공

영화 <태일이>에선 국내 애니메이션 중 흥행 1위 기록을 유지하고 있는 <마당을 나온 암탉> 제작사 명필름 고유의 톤을 느낄 수 있게 부드러운 작화가 이어진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전태일이 현실을 고발하는 장면이 전개될 때도 그의 사후 그에게 씌워진 ‘열사’라는 인상만을 부각하는 대신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연출을 맡은 홍준표 감독은 “시나리오를 받고 전태일에 대해 더 많이 들여다보고 또 알아보니 단순하게 열사의 이미지만 갖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더라”며 “우리 세대가 새로운 시각으로 젊은 청년이자 우리와 비슷한 동료 태일이로서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다음 세대에게 이야기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했다”고 말했다.

다만 실제 공동체상영 현장에선 예기치 못한 분위기 반전도 종종 나왔다. 대형 스크린이 걸린 영화관이 아니라 소규모 극장을 빌려 잘 아는 동료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와중에는 공감의 기류가 더욱 빠르게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소속인 한 조합원은 “상영을 시작하고 일찍부터 울음바다가 됐던 극장에서 감독 이름(홍준표) 크레디트가 올라오자 다들 빵 터졌다”고 전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선 찬밥신세

보통의 상업영화와는 달리 스크린을 확보하기 쉽지 않은 독립·예술영화는 공동체상영과 뒤이어 진행하는 GV(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최대한 접점을 늘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태일이> 역시 코로나19 때문에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의 발걸음이 늘기 어려운 시점에서 경험하는 한계 외에도 대형 영화관 스크린 점유율이 빠르게 떨어지는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만든 인물을 조명했다는 점 때문에 노동계와 교육계,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단체관람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를 공동제작한 질라라비의 양기환 대표는 “‘위드 코로나’ 덕에 단체관람이 한동안 가능했지만 최근에 다시 향후 상영일정이 불투명해지는 위기도 맞고 있다”며 “그래도 전태일 열사 당시부터 현재까지 계속되는 노동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를 이해하기 쉬운 애니메이션으로 담아낸 작품이라 호응도 좋아 내년 3월까지로 예정된 공동체상영 계획이 쉽게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속 태일은 아무리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려 동분서주해도 현실의 벽을 넘어서기 힘들어 낙담하게 되자 평화시장 건물 옥상에서 마음을 추스르려 한다. 그에게 다가온 친구 영미는 주머니에 있던 작은 원단 조각들을 바람에 날려보내며 태일에게도 원단 조각을 나눠준다. 지난 11월 30일 같은 노동조합 소속 조합원들과 함께 공동체상영으로 영화를 관람한 김원영씨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꼽은 장면이었다. 그는 “영화를 볼 땐 원단 조각처럼 전태일의 노력도 흩어져 뿌려지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조금 지나 곰곰 생각하니 그렇게 뿌린 작은 조각들이 사라지지 않고 지금 우리 노동자들에게 작은 희망이 돼 돌아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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