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권력, 긴장과 순응 사이 장이머우의 줄타기

백승찬 기자

두 번의 올림픽 행사 연출 맡아 ‘국책 예술가’ 면모

문화혁명기, 노동교화소 출신 주인공 내세운 ‘원 세컨드’

2019 베를린영화제에서 석연찮은 이유로 출품 철회

“신장·위구르 강제노동 연상케 해 당국 심기 거슬린 듯”

<원 세컨드> 촬영 현장의 장이머우 감독 | 찬란 제공

<원 세컨드> 촬영 현장의 장이머우 감독 | 찬란 제공

4일 오후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가 타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4일 오후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가 타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일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회식은 예상과 달랐다. 인력과 자본을 대거 투입하는 대신 첨단기술을 활용한 간결한 행사로 꾸며졌다. 핵심은 성화 점화 방식이었다. 대회 기간 내내 많은 가스를 사용하는 성화대 점화 방식을 버리고, 작은 성화봉을 눈꽃송이 조형물에 꽂는 것으로 대체했다.

과거 중국영화를 대표했던 감독 장이머우(71)가 2008 베이징 하계올림픽에 이어 다시 한번 개·폐회식 총감독을 맡았다. 14년에 걸쳐 대규모 국가행사를 두 차례나 책임진 것이다. 이 같은 경력에서 장이머우를 ‘국책 예술가’라 봐도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지난달 개봉한 <원 세컨드>를 둘러싼 일들은 장이머우와 국가의 모호한 관계를 드러낸다.

<원 세컨드>는 2019년 제69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뜻밖의 논란에 휘말렸다. 경쟁부문에서 상영하기 전날 “기술적 이유”로 출품이 철회된 것이다. 외신들은 중국 정부의 개입을 의심했다. 특정한 정치색을 보이지 않으며 소박한 감성을 능숙한 손길로 드러낸 이 영화에 무언가 중국 당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내용이 있을 것이라 추정했다. 버라이어티는 “ ‘기술적 이유’란 당국이 모든 세부 요소에 대해 승인하기 전까지는 영화를 완성했다 할 수 없는 중국 감독들이 마주친 완곡어법이자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원 세컨드>는 중국의 문화혁명기를 배경으로 한다. 남루한 행색의 중년 남성 장주성이 네이멍구 사막 지대를 가로질러 한 시골 마을을 찾아온다. 장주성은 영화 상영 전에 틀어주는 짤막한 선전영화(한국의 대한뉴스 격)를 보기 원한다. 이 영화에 오래전 헤어진 딸이 1초(원 세컨드)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필름이 이미 다른 마을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안 장주성은 또다시 길을 떠나다가 필름을 훔치려는 소녀 류가녀를 만난다. 장주성은 영화를 보기 위해 필름을 지켜야 하고, 류가녀 역시 나름의 이유로 필름을 훔쳐야 한다.

영화 관람 경험 자체가 귀하던 당시 중국에서 두 달에 한 번꼴로 영화가 상영되는 날은 마을 잔칫날처럼 묘사됐다. 마을의 영사기사는 큰 권력을 누린다. 운반 도중 필름통이 열려 필름이 모래 바닥에 끌리자, 영사기사는 주민들을 모아 필름을 섬세하게 닦아내도록 시킨다. 증류수를 만들어 모래를 훑어내고 섬세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뒤 부드러운 부채질로 수분을 말린다. 정성스럽게 복원한 필름을 틀기 직전의 마을회관에는 설렘이 가득하다.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마법처럼 홀리던 시대의 풍경이다.

영화 <원 세컨드>의 한 장면 | 찬란 제공

영화 <원 세컨드>의 한 장면 | 찬란 제공

영화 <원 세컨드>의 한 장면. 시골 주민들은 흙바닥에 끌린 필름을 정성스럽게 세척해 상영을 준비한다. | 찬란 제공

영화 <원 세컨드>의 한 장면. 시골 주민들은 흙바닥에 끌린 필름을 정성스럽게 세척해 상영을 준비한다. | 찬란 제공

영화 <원 세컨드>의 한 장면 | 찬란 제공

영화 <원 세컨드>의 한 장면 | 찬란 제공

<원 세컨드> 속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군의 활약상을 그린 <영웅아녀>(1964)다. 많은 시골 관객들은 이미 이 영화를 봤음에도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고 열광한다.

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이라 불리는 한국전쟁 영화·드라마들이 최근 잇달아 공개되고 있다. 대부분 콘텐츠들은 미군에 맞서는 중국 인민군의 영웅적 활약상을 묘사한다. 장이머우와 함께 중화권 영화를 대표했던 천카이거, 쉬커 등이 공동 연출한 <장진호>(2021)는 역대 최대 제작비(약 2400억원)를 들여 1조원이 넘는 최대 흥행 수익을 올렸다. <영웅아녀>는 이 같은 ‘항미원조’ 영화의 원조격이다. 장이머우가 <원 세컨드>에 <영웅아녀>를 삽입한 것을 보면 그 역시 중국의 자긍심 고취에 동참하고 있는 듯 보인다.

<원 세컨드> 속 <영웅아녀>가 배치된 맥락은 중국 체제와 역사에 대한 장이머우의 입장을 모호하게 만든다. 시골 관객들은 영화 속 군가를 따라 부르거나 신파적 스토리에 운다. 소박함과 촌스러움의 경계에 있는 모습이다. 이 장면은 <장진호>를 보고 거수경례하는 오늘날 중국 관객의 모습과 겹쳐 동시대 ‘항미원조’ 영화와 그 반응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힌다.

등장 인물과 시대 배경은 장이머우의 입장을 한층 날카롭게 드러낸다. <원 세컨드>의 시대배경인 문화혁명기는 현대 중국사의 암흑기다. 장주성은 억울하게 노동교화소에 끌려간 것으로 설정됐다. 장주성이 들르는 시골 마을들은 빈곤을 겪고 있는 것으로 묘사됐다. 영화를 이끌어 가는 장주성과 류가녀는 <영웅아녀>에 전혀 관심이 없다.

장이머우는 문화혁명기에 하방됐다가 뒤늦게 베이징영화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그는 <붉은 수수밭>(1988)으로 천카이거 등과 함께 중국 5세대 감독의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귀주 이야기>(1992), <인생>(1994) 등은 숱한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장이머우 영화 인생의 전성기를 장식했다. 장이머우는 2000년대 이후 중국 정부의 대대적 지원을 받은 ‘인상’ 시리즈를 통해 공연에도 손을 뻗쳤다.

장이머우가 중국 당국과 항상 화합했던 것은 아니다. 장이머우는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막대한 벌금을 낸 적이 있다. 사치가 극에 달한 후당 황실의 암투를 그린 <황후화>(2006)를 공개했을 때는 공산당 간부로부터 “스크린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도색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장이머우는 <원 세컨드>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논란을 일으킨 이후 <공작조: 현애지상>(2021)을 선보였다. 1931년을 배경으로 일본군에 맞서는 중국 스파이의 활약상을 그렸다. 한국영화로 치면 최동훈 감독의 <암살>(2015)과 유사한 소재다. 매끈한 스파이 스릴러인 <공작조>는 항일하다 숨져간 애국자들을 추모한다. 경력 내내 예술과 권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온 장이머우의 행적이 <원 세컨드>와 <공작조>의 차이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김정구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최근 중국영화는 대만 청춘영화의 영향을 받은 멜로물, <전랑> <유랑지구> 등의 블록버스터가 대세였으며, 장이머우는 이 같은 흐름에 밀려 영화계 입지가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며 “<원 세컨드>는 네이멍구의 노동교화소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최근 중국 정부가 특히 민감해하는 신장·위구르 강제노동을 연상케 해 당국의 심기를 거슬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영화 <공작조: 현애지상>의 한 장면

영화 <공작조: 현애지상>의 한 장면

영화 <붉은 수수밭>의 한 장면

영화 <붉은 수수밭>의 한 장면

영화 <황후화>의 한 장면

영화 <황후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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