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핑 업'은 그만...장애인 역할은 장애인 배우가 할 수 없을까

백승찬 기자
영화 <시라노>의 한 장면 |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시라노>의 한 장면 |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나의 왼발>로 1990년 제6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는 이 영화에서 실존인물인 아일랜드의 뇌성마비 장애인 크리스티 브라운 역할을 연기했다. 에디 레드메인 역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의 장애인 연기로 2015년 제87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레드메인이 연기한 인물은 루게릭병을 앓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었다.

두 배우의 연기력에는 큰 이견이 없겠지만, 앞으로 서구권 영화에서 이 같은 연기는 보기 힘들 수 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 역을 맡는데 대해 비판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의 장애인 연기를 두고 서구에서는 ‘크리핑 업’(cripping up·장애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이라고 부르곤 한다. 마치 원작의 아시아계나 흑인 역할을 각색해 백인이 맡는 것을 두고 ‘화이트워싱’이라고 비판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지난주 개봉한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다발경화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고 하지가 마비된 남자 야코(페트리 포이콜라이넨)가 머나먼 곳에 사는 연인을 홀로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안전한 집을 자신의 의지로 떠난 야코는 원하면 언제든 연인 앞에 나타날 수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감독 테무 니키는 20년 전 함께 연극을 했던 친구 포이콜라이넨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이 영화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포이콜라이넨은 실제 다발경화증 장애인이었다. 니키는 “주인공이 물리적 손상을 입은 많은 영화들을 봤지만 한 번도 시각 장애인의 입장에서 촬영된 것은 본 적이 없다”며 “관객에게 ‘시각 장애라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영화적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대부분 클로즈업으로 촬영됐고,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는 초점이 흐리게 보여진다.

영화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의 한 장면 | 슈아픽쳐스 제공

영화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의 한 장면 | 슈아픽쳐스 제공

원작의 비장애인 설정을 장애인으로 바꾼 경우도 있다. 지난달 개봉한 <시라노>는 17세기 희곡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영화다. 키 132㎝의 왜소증 장애인 피터 딘클리지가 용맹한 군인이자 탁월한 시인인 시라노 역을 맡았다. 원작에선 너무 크고 휘어진 코 때문에 자신감이 없는 시라노가 영화에선 장애인으로 설정됐다. 영화 속에서 시라노의 장애를 따로 언급하진 않는다. 다만 그가 사랑하는 여인 앞에 나서기 어렵게 만드는 하나의 특성 정도로만 묘사된다.

지난해 개봉한 마블 영화 <이터널스>에는 단숨에 대륙을 이동할 정도로 빠른 농인 슈퍼히어로 캐릭터 마카리가 등장했다. 원작 코믹스의 마카리는 금발의 남성 청인이지만, 영화에선 흑인 여성 농인으로 바꿨다. 마카리 역의 배우 로런 리들로프는 실제 농인이다. 영화 속에서 장애는 슈퍼히어로의 한 특성으로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지난해 개봉한 <코다>는 농인 가족 안의 청인 딸 이야기를 담았다. 이 영화에서 농인 가족 역할은 모두 농인 배우가 맡았다. 이 배우들은 지난달 열린 제27회 미국 배우조합상에서 영화 부문 앙상블상을 받았다. 말리 매틀린은 “이 상은 우리 농인 배우들이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처럼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농인 배우는 더 많은 기회를 원한다”는 수상소감을 밝혔다.

영화 <이터널스>에서 농인 슈퍼히어로인 마카리(왼쪽)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영화 <이터널스>에서 농인 슈퍼히어로인 마카리(왼쪽)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영화 <코다>의 한 장면 | 판씨네마 제공

영화 <코다>의 한 장면 | 판씨네마 제공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모든 사람은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이라는 두 가지 시민권을 갖고 있다”며 “언젠가 우리 모두는 다른 편의 시민권을 갖도록 강제된다”고 말했다. 장애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로 나눌 수 없으며, 장애인을 위한 시설은 결국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시설이 된다. <이터널스>의 리들로프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촬영장에서 필요한 걸 자연스럽게 요구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리들로프는 “처음에 난 농인이 얼마나 함께 일하기 쉬운 사람인지 보여주려 했다”며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들만의 요구사항을 갖고 있었고, 나 역시 배우로서 필요한 걸 요구하는데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장애 당사자가 장애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영화, 드라마에서 비장애인이 연습해 장애인을 연기한다. 특히 대중적인 작품에는 캐스팅하려 해도 장애인 배우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변재원 소수자정책연구자는 배우 인프라 구축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전국 각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장애인이 입학하는게 불가능하고, 대학 바깥 연극 무대에도 장애 배우가 접근하기 어렵다”며 “미술, 음악 분야에선 장애인 예술가의 활약을 찾을 수 있는데 연기, 무용 등 퍼포밍 아트에선 장애인을 찾을 수 없다는 건 이 분야에 대한 접근성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전지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는 논문 ‘장애예술과 장애인예술의 개념 논의’에서 “장애예술이 보다 깊이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는 신체적·정신적 불편함이 있느냐의 문제를 넘어 억압된 존재에 대한 성찰을 통해 평등한 인권을 고뇌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장애는 결여가 아니라 ‘다름’이고 그 예술의 ‘특수성’이 사회의 다양성과 창의성의 기반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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