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말 사치가 심했을까

박주연 선임기자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EMK뮤지컬 제공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EMK뮤지컬 제공

라이선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가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성황리에 공연 중이다. 오는 10월 3일까지 계속되는 이 작품은 <모차르트!>, <엘리자벳>, <레베카> 등으로 잘 알려진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가 탄생시킨 일본 창작 뮤지컬이다. 일본 뮤지컬 기획사 토호가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왕비 앙투아네트>를 원작으로 2006년 제작했다. 한국 버전은 EMK뮤지컬컴퍼니가 뮤지컬 넘버 4곡을 추가로 받고, 대사도 한국 정서에 맞게 수정해 2014년 초연했다.

뮤지컬은 18세기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드라마틱한 삶을 허구의 인물 ‘마그리드 아르노’의 삶과 대조시켜 조명한다. 귀에 쏙 들어오는 뮤지컬 넘버와 배우들의 가창력, 화려한 의상·가발과 360도 회전하는 무대장치가 매혹적이다. 하지만 허구인물 아르노가 앙투아네트의 이복자매라는 등의 억지 설정과 다소 느슨한 플롯은 긴장감을 흐트러뜨린다.

앙투아네트의 삶은 여성감독 소피아 코폴라가 연출한 2007년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도 다룬 바 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이 영화는 전기작가로 저명한 안토니오 프레이저의 <마리 앙투아네트>(2001)를 원안으로 삼되, 처형 부분을 빼고 베르사유 부분만 가져왔다. 프레이저는 이 책 집필 전 프랑스 왕립 고문서보관실에서 18세기 당시의 사료들까지 면밀히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리 앙투아네트 12살 때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마리 앙투아네트 12살 때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세간에 잘못 알려진 내용 적잖아

앙투아네트와 관련해 세간에는 잘못 알려진 내용이 적잖다. 대표적인 게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의 일종인) 브로슈를 먹게 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대다수 역사학자는 그것이 일종의 유언비어였다는 학설을 지지한다. 프레이저의 책에 따르면 앙투아네트는 일기에 이렇게 기술했다. “자신들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매우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그들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해집니다. 왕은 이 진실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대관식 날을 평생 (제가 백년을 산다 하더라도) 잊지 못할 겁니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앙투아네트의 다짐을 엿볼 수 있다. 루이 16세의 대관식은 1775년 6월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랭스에서 거행됐다. 그 여정에서 앙투아네트는 왕가의 가족 중 유일하게 마차가 소작인의 옥수수밭을 밟고 가 망치는 것을 거부했다고도 기술돼 있다.

앙투아네트는 사치가 심했을까? <리베르떼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의 저자인 주명철 한국교원대 명예교수는 “그 당시 귀족으로서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사치가 아니었음에도 재정파탄 등에 대한 시민 반발이 여왕을 향한 비난으로 집중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궁정 예법을 배우지 못해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시동생들과 놀러다니며 영국식 스타일의 옷을 맞춰 입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오랜 적국인데다 특히 자식을 낳지 못하다 보니 나쁜 소문이 났다”고 설명했다.

앙투아네트는 1755년 11월 2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후 마리아 테리지아의 15번째 자녀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1770년 4월 그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정부의 합의에 의해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를 정략 결혼한다. 하지만 7년간 양국의 왕과 황후가 그렇게 압박했던 출산은커녕 동침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도 그 이유는 생략돼 있지만 루이 오귀스트에게 성적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성포경’이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요셉 2세가 신분을 위장해 국경을 넘어 베르사유를 방문해 루이 16세와 만난다. 이유를 알곤 수술을 권한다. 1777년 앙투아네트가 어머니 마리아 테리지아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이제 진짜 결혼을 성사시켰다”고. 마침내 동침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이듬해 12월에 공주 마리 테레즈를, 1781년 10월엔 첫 왕태자 루이 요제프를 출산하는 등 모두 4명의 자녀를 출산한다. 하지만 장녀를 제외하곤 전부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특히 여덟 살의 차남 루이는 루이 16세 처형 후 앙투아네트까지 없애기로 마음먹은 공화정을 지지하는 자코뱅파의 세뇌로 법정에서 어머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증언한다. 1793년 10월 16일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후 루이는 학대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열 살의 나이에 사망한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뮤지컬과 영화로 만날 수 있어

뮤지컬에선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왕위 자리를 노리는 오를레앙 공작이 로앙 추기경의 애인인 라모트 백작 부인과 짜고 벌인 것으로 그렸다. 주 명예교수의 설명은 다르다. 오를레앙 공작과 관계없이 라모트 백작 부부의 사기행각일 뿐이고, 추기경과 라모트 백작 부인이 연인관계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를레앙은 루이 16세와 사촌지간으로 진보적 사고를 지녀 혁명세력과 가깝게 지냈지만 결국 그들에 의해 희생된다.

라모트 백작 부인은 빚에 쪼들린 보석상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애타게 팔고 싶어한다는 소문을 듣고 보석상, 그리고 왕비와 관계를 개선하고 싶은 로왕 추기경을 속이기로 작심한다. 이를 위해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창녀를 앙투아네트로 변장시켜 보석상으로부터 목걸이를 받아온 추기경과 한밤중에 찰라적으로 만나게 해 목걸이를 손에 쥔다. 추기경은 여왕이 자신에게 목걸이를 가져다 달라고 임무를 부여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모트 백작 부부는 목걸이를 손에 넣자마자 해체해 영국에 팔아넘겼다. 주 명예교수는 “이 목걸이는 당초 루이 15세에게 팔아 그의 정부인 마담 뒤바리에게 선물하도록 하게 할 목적이었으나 루이 15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무산됐다. 이후 보석상은 타깃을 바꿔 앙투아네트를 찾아갔지만, 그는 ‘지금 프랑스엔 배 한척이 필요하지 이런 목걸이가 왜 필요하냐’며 거절했다”고 말했다. 7년 전쟁 등 영국에 뒤진 프랑스 해군력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국가재정이 거의 파탄에 이를 때 발생해 국민의 분노를 샀고 여기에 악의적 성적 비방과 음모가 더해져 앙투아네트를 더욱 곤경에 처하게 했다.

한편 루이 16세의 꿈이 대장장이였고, 앙투아네트에게 자신의 아이디어가 가미된 새 발명품 단두대 모형을 보여주는 뮤지컬 속 장면도 실제와 다르다. 루이 16세는 열쇠 만드는 게 취미였으며, 단두대를 발명한 것은 루이 16세와 이름이 같은 외과의사 앙투안 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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