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 쌓아올린 소리가 웅장한 화음이 된다읽음

올댓아트 정다윤 에디터·임승은 인턴

루프 스테이션을 아시나요

루프 스테이션을 본격적으로 선보인 뮤지컬 <아일랜더>에서 배우들이 루프 스테이션을 조작하고 있다. 우란문화재단 제공

루프 스테이션을 본격적으로 선보인 뮤지컬 <아일랜더>에서 배우들이 루프 스테이션을 조작하고 있다. 우란문화재단 제공

최근 개막한 뮤지컬 ‘아일랜더’엔 악기가 없다. 무대 위에 오른 건 정체 모를 기계장치
배우들은 그 앞에서 발을 구르거나 손뼉을 치고 파도·전화벨·헬리콥터 소리 같은 효과음을 녹음한다
몇몇 아티스트들이 종종 사용해왔던 ‘루프 스테이션’의 활용이 더 많은 장르로 확장되고 있다

‘뮤지컬’ 하면 누구나 떠올리게 되는 것은 ‘넘버’다. 즉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가 극을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동력이 된다. 이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오케스트라, 혹은 밴드다. 그도 아니면 소박하나마 한두 개의 악기가 무대 주변에 함께한다. 최근 개막한 뮤지컬 <아일랜더>는 이 같은 고정관념을 완전히 깬 작품이다. 어떠한 악기도, 연주자도 없다. 배우들이 악기의 역할까지 하는 뮤지컬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대에 있는 것은 배우와 마이크, 그리고 스탠딩 테이블이 전부다. 테이블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가 놓여 있다. 파격과 변화의 핵심은 바로 이 기계장치, 즉 ‘루프 스테이션’이다. 배우들이 악기가 되도록 만들어주는 ‘비밀병기’다.

가수 헨리가 <비긴어게인>(jtbc)에서 드릴 소리를 루프 스테이션으로 녹음하고 있다. 유튜브 화면 캡쳐

가수 헨리가 <비긴어게인>(jtbc)에서 드릴 소리를 루프 스테이션으로 녹음하고 있다. 유튜브 화면 캡쳐

루프 스테이션은 일종의 녹음기다. 특이한 점은 녹음된 구간 위에 다른 소리를 녹음하면 앞서 녹음된 부분 위에 새로 녹음한 소리가 쌓아 올려지는 방식이다. 여러 소리를 차례로 녹음하면 합주된 소리로 나오기 때문에 반주로 사용할 수 있다. 밴드의 연주나 아카펠라 그룹이 화려하게 연출하는 화음을, 이 기계만 있으면 연주자나 배우 혼자서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뮤지컬에서 이런 장치가 사용되는 것은 획기적인 시도로 받아들여지지만 대중음악계에서는 종종 사용됐다. 2017년 가수 헨리가 <나 혼자 산다>(MBC)에 이 장치를 선보였는데, 당시 꽤 화제가 됐다. 그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그리고 다양한 사물을 타악기로 활용해 차례로 녹음을 하며 마크 론슨의 ‘Uptown Funk’를 연주했다. 이후 <비긴 어게인>(JTBC)에서 시연했던 이매진 드래곤스의 ‘Believer’는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피아노 반주 위에 드럼통, 드릴 소리를 차례로 얹은 그의 연주에 많은 시청자들은 감탄했고 신기하다는 반응도 많았다. 주변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사물만으로도 극적인 연주와 효과음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스텔라장이 루프 스테이션을 조작하며 녹음하는 장면. 유튜브 화면 캡처

스텔라장이 루프 스테이션을 조작하며 녹음하는 장면. 유튜브 화면 캡처

싱어송라이터 스텔라 장은 ‘루프 스테이션 장인’으로 불리는 아티스트다. 지난해 자신의 노래 ‘YOLO’와 ‘Colors’를 루프 스테이션으로 연주해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이 영상들은 각기 200만회에 이르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스텔라 장은 기구나 악기를 사용하는 대신 목소리와 간단한 손짓만으로 소리를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박수와 손가락 스냅으로 박자를 만든 뒤, 그 위에 여러 차례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는 식이다. 이 때문에 소리만 듣다 보면 아카펠라 그룹이 화음을 맞추는 것처럼 들린다.

뮤지컬 <아일랜더>는 스텔라 장이 선보인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넘버를 구성한다. 무대에 등장한 두 배우는 루프 스테이션 앞에서 손과 발, 목소리만을 사용한다.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는 식으로 소리를 한 단계씩 쌓아 올리며 웅장한 화음을 만든다. 파도, 고래, 헬리콥터, 전화벨 등 대부분의 효과음도 직접 구현해 아날로그적 감성을 극대화한다. 이 작품을 관람한 관객들의 호평과 찬사도 이어지고 있다. 공연 관련 커뮤니티나 티켓 예매 사이트 등에는 “도전적이고 실험적이다” “뮤지컬, 그 이상의 경험” “최소의 장치로 표현하는 최대의 퍼포먼스” 등의 후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공연계에서는 루프 스테이션의 활용이 앞으로 확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공간과 장비의 제약을 덜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창의적인 시도도 더 활발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소극장 뮤지컬에서 그 효과나 활용도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소극장 뮤지컬은 대체로 공간이 협소하기 때문에 다양한 악기의 사용이 어렵다. 올 8월 폐막한 소극장 뮤지컬 <유진과 유진> 일부 장면에도 루프 스테이션이 사용돼 눈길을 끌었다. 페트병을 쥐어짜거나 종이를 찢고 비닐봉지를 구기는 소리를 녹음해 주인공 캐릭터의 불안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최근에는 다른 예술 장르로도 루프 스테이션 활용이 확장되고 있다. 대금 솔리스트 백다솜이 대표적 인물이다. 한국 전통 악기를 기반으로 실험적 음악을 만드는 그는 대금, 소금, 생황 등을 연주하며 다양한 소리를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기존 국악과는 차별화된 신선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는 앨범 <무(無)>에서 한숨 소리로 반주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빅바이올린 플레이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첼리스트 임이환의 작업도 주목할 만하다. 현을 튕기거나 긁고, 악기의 몸통을 두드리며 반주를 쌓아가는 퍼포먼스를 통해 한 대의 첼로가 펼쳐내는 연주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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