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에 다시 쓰는 희망의 묵시록, ‘엔젤스 인 아메리카’

선명수 기자

퓰리처상 수상 토니 쿠슈너 희곡 원작
러닝타임 8시간 넘는 대작…지난해 ‘파트 원’ 이어 ‘파트 투’ 공연
“우리는 파멸을 향해가는가?”
전쟁·혐오 만연한 현재를 꿰뚫는 질문들

국립극단이 지난해 말 첫 선을 보인 토니 쿠슈너 원작의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2부, ‘페레스트로이카’가 지난달 28일 공개됐다. 세기말의 혼돈과 공포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이 연극은 발표 30여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동시대성을 갖는다. 사진은 1부 공연의 마지막 장면.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이 지난해 말 첫 선을 보인 토니 쿠슈너 원작의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2부, ‘페레스트로이카’가 지난달 28일 공개됐다. 세기말의 혼돈과 공포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이 연극은 발표 30여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동시대성을 갖는다. 사진은 1부 공연의 마지막 장면. 국립극단 제공

1991년 초연한 토니 쿠슈너의 희곡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새 밀레니엄을 앞둔 세기말의 혼돈과 공포를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방대한 서사로 빚어낸 수작이다. 냉전의 끄트머리에 남은 시대적 폭력의 부산물들과 새로운 역병의 창궐 등 세기말적 분위기가 전반에 흐르는 이 작품은 발표 후 30여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동시대성을 내포한다. “우리는 파멸을 향해가는가?” “우리는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연극은 관객에게 첨예한 질문을 던지며 그 문을 연다.

지난해 말 국립극단이 첫 선을 보인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신유청 연출)의 2부에 해당하는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가 공개됐다. 지난해 ‘밀레니엄이 다가온다’라는 부제로 무대에 오른 ‘파트 원’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공연은 그 스케일 면에서도 압도적이다. 쿠슈너는 총 러닝타임이 8시간을 넘는 대작을 2부로 나눠 집필했고, 이번 ‘파트 투’ 공연의 러닝타임만 290분에 달한다.

“반갑다, 예언자여. 이제 뜻이 이루어지이다. 여기 메신저가 왔다.” 보수주의와 에이즈 공포가 퍼져나가던 1985년 미국 뉴욕. 에이즈에 걸려 연인에게 버림 받은 동성애자 ‘프라이어’ 앞에 천장을 뚫고 천사가 강림하는 장면으로 ‘파트 원’은 마무리됐다. 이어지는 ‘파트 투’에선 천사로부터 ‘예언자’의 칭호를 부여 받은 프라이어와 그의 주변 인물들이 절망과 혼란 속에서도 자신 앞에 놓인 장벽을 뚫고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전편이 1980년대 레이건 집권기의 보수적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혼란을 그렸다면, 이번 공연은 극한의 위기에 내몰린 인물들이 각각 어떤 선택을 통해 삶을 회복해 나가는지에 주목했다. 신유청 연출은 지난해 공연 당시 인터뷰에서 “혐오와 편견, 갈등과 분열의 장벽을 허물고 용서와 화합으로 순간으로 향하는 여정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2부의 부제는 ‘페레스트로이카’. 1980년대 후반 구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시도한 일련의 개혁 정책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는 냉전의 종식과 함께 낡은 질서의 붕괴를 암시하는듯 하지만, 공연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볼셰비키’ 알렉시 안테딜루비아노비치 프렐라프사리아노프(Aleksii Antedilluvianovich Prelapsarianov)의 격앙된 연설로 시작된다. 크렘린궁전 극장 연단에 선 눈 먼 늙은 혁명가는 “새로운 껍질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뱀이 허물을 벗어버린다면, 그 발가벗은 뱀은 세상에 내던져져 무질서한 힘에 먹혀버릴 것”이라며 이념으로 재무장할 것을 주문한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서는 절대 안돼!”라는 그의 포효는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 속에서 인물들에게 주어진 도전을 은유한다. 인류 앞에 놓인 세 번째 밀레니엄을 앞두고, 저마다의 공포와 혼란에 질식된 인물들은 나아갈 것인지, 혹은 멈출 것인지 각자의 시험에 들게 된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중첩된 혼돈 속에서 환영이 겹겹의 장치로 이야기에 틈입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프라이어(정경호)는 천사로부터 ‘너희(인간)는 움직이지 말 것’ ‘지구는 결국 멸망할 것’이란 계시를 받는다. 남편의 커밍아웃 후 약물 중독 증세가 심해진 하퍼(김보나)도 자주 환영 속을 헤맨다. 에이즈에 걸린 후 그간 쌓아온 사회적 지위를 잃은 극우 변호사 로이 콘(박지일) 앞에는 자신의 권모술수로 사형을 당한 에델 로젠버그(전국향)의 유령이 나타난다. 두 사람 모두 매카시즘 광풍의 한가운데 있었던 미국 정치사의 실존 인물로, 작가는 죽음을 앞둔 ‘악마의 변호사’ 로이 콘(도널드 트럼프의 변호인이기도 했다)과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한 자의 유령을 대면하게 함으로써 작품이 노정한 저항적 면모뿐 아니라 극적 재미까지 선사한다. 무대 중앙의 턴테이블이 장면 전환의 주요 장치로 사용돼 현실과 환상을 효과적으로 넘나든다. 회전 무대는 하나의 장면이 마치 누군가의 꿈이나 환영일 수 있다는 듯 관객 앞에 나타나고 사라지며, 최소한의 장치로 수많은 장면들을 연결해 방대한 서사를 구축해낸다.

“우리는 스치듯 희망과 살아간다”는 프라이어의 말처럼, 연극은 혼돈과 절망 가운데서도 결국 희망을 묵시한다. 1980년대 ‘신의 응징’이라 여겨졌던 에이즈 환자인 프라이어가 예언자로 선택되고, 그가 성서 속 야곱처럼 천사와 씨름을 벌이는 장면은 구원을 찾아가는 인간의 여정을 대변한다. 작품을 쓴 쿠슈너는 게이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커밍아웃 동성애자이자 유대계 작가로, 자신의 화두를 적극적으로 작품 속에 녹여냈다. 천사와의 씨름은 ‘멈춰 있으라’는 숙명을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고독한 싸움이지만, 그것이 공포나 고통이 아니라 궁극의 성적 희열로 그려지는 대목 역시 흥미롭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쿠슈너는 이 작품 2부를 일종의 ‘희극(Comedy)’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재치 있는 대사와 신랄한 유머, 곳곳에 배치된 공중 장면 등 스펙터클한 볼거리로 다섯 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무색하게 시간이 흘러간다. 전편에 이어 키를 잡은 신유청 연출은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이 매력적인 희곡의 메시지를 능수능란하게 무대화했고, 8명의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의 합도 빼어났다.

극이 담고 있는 어둡고 혼란한 시대적 증세들은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 밖 현실과 묘하게 닮아 있다. 소수자 혐오와 배제의 선긋기는 여전하고, 인류는 새천년의 도래 후에도 새로운 역병의 공포에 직면했다. 극중 하퍼가 집착하는 오존층의 파괴는 기후재앙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고, 다시 시작된 전쟁으로 신냉전의 서막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목소리도 들린다.

연극은 5년이 흐른 1990년, 센트럴파크의 베데스다 분수 앞에 모인 인물들이 냉전의 종식과 다가올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며 막을 내린다. ‘뱀의 새로운 껍질’은커녕 다시 ‘옛 껍질’로 회귀하려는 이때 “장벽을 부수는 이야기”(신유청 연출)가 주는 울림이 간단치 않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27일까지. 20세 이상 관람가.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 파트 투 : 페레스트로이카>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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