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배역, 두 명의 배우···다름을 넘어 ‘합★체’로

선명수 기자

박지리 작가 동명 소설 원작 음악극 ‘합★체’

작은 키 고민인 쌍둥이 형제 성장담 유쾌하게 그려

‘그림자 통역’부터 ‘터치투어’까지, 배리어 프리로 진행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는 음악극 <합★체>의 한 장면. ‘배리어 프리’를 지향하는 공연은 수어통역사가 배우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함께 연기하는 ‘그림자 통역’으로 진행된다. 국립극장 제공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는 음악극 <합★체>의 한 장면. ‘배리어 프리’를 지향하는 공연은 수어통역사가 배우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함께 연기하는 ‘그림자 통역’으로 진행된다. 국립극장 제공

형제에게 아버지는 ‘예능인’이었지만,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쟁이! 쇼쟁이!”라 불렀다. “매일매일 셀 수 없이 많은 공을 쏘아올리며” 놀이공원에서 공연을 하는 아버지에게서 사람들은 ‘난쟁이’라는 점밖에 보지 못했다. 공연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구절을 인용한 대사로 문을 연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쟁이었다. (…) 난쟁이라는 것 외에,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박지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음악극 <합★체>는 저신장 장애인 아버지와 비장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작은 키가 고민인 쌍둥이 형제 ‘오합’과 ‘오체’의 성장담을 그린다. 성적부터 성격까지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지만 키 순서로 1·2번을 다투는 형제는 학교에서 싸잡아 ‘합체’로 불린다. 작은 키 때문에 “니들은 이름처럼 합체 좀 해야겠다”는 놀림을 받던 형제는 어느 여름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계룡산으로 떠난다. 계룡산에서 도를 닦았다는 ‘계도사’에게 ‘키 크는 비기’를 전수받고 특별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하나의 배역에 두 명의 배우, 두 언어로 풀어가는 공연

쌍둥이 ‘합’과 ‘체’가 등장할 때 무대 위에 선 배우는 4명이다. 공연 내내 수어통역사들이 배우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함께 연기한다. 짝을 이룬 배우와 수어통역 배우의 성별도 연령대도 다르지만,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동작과 표정을 지으며 함께 연기한다. 한 배역을 두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셈인데, 각각 한국어와 한국수어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를 뿐이다.

<합★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배리어 프리(Barrier-Free·무장애)’ 공연을 지향한다. 자막과 수어통역, 음성해설, 수어를 활용한 안무까지 ‘무대가 들리고 노래가 보이는’ 공연을 만들기 위해 창작 단계부터 오랜 고민과 연구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림자 통역’으로 진행되는 수어통역은 수어통역 자격증을 보유한 배우 3명과 무대 경험이 있는 전문 수어통역사 2명이 맡았다. 이들은 배우의 대사를 수어로 전달하면서 춤추고 연기도 한다.

음악극 <합★체>의 한 장면. 국립극장 제공

음악극 <합★체>의 한 장면. 국립극장 제공

음성해설을 극중 배역으로 풀어낸 점도 차별화된 전략이다. 보통 배리어 프리 공연들이 별도 장비를 통해 시각장애인 관객들에게 음성해설을 제공한 것에서 한발 나아간 방식이다. 원작 소설에선 잠깐 나오는 라디오 DJ ‘지니’가 전지적 작가 시점의 해설자로 등장해 음성해설을 대신 하는데, 마치 마당극의 재담꾼이나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극의 분위기를 띄우며 관객 웃음도 유도한다. 공연은 ‘지니’의 라디오 방송에 등장하는 여러 사연과 이 방송을 듣는 형제들의 반응을 통해 해설자의 존재 역시 자연스럽게 극의 일부로 녹여냈다.

수어 활용한 안무, 음악에 녹인 소리···‘무대가 들리고 노래가 보이는’ 공연

배리어 프리 공연을 제작하며 장애인 당사자성을 담아내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수어와 어순이 다른 한국어 문장을 이질감 없이 전달하기 위해 농인 당사자가 수어 대본을 번역했다. ‘예쁜 꽃’이라는 표현을 수어로 ‘꽃 예뻐’로 표현하는 식이다. 극중 저신장 장애인인 아버지 역할은 장애인 배우가 연기했다.

음성해설과 수어를 음악과 안무에도 반영했다. 안무 속 수어 동작을 정확하게 구사하기 위해 모든 배우가 수어 교육을 받았고, 음악에서도 통통통 공이 튀는 소리, 기차가 움직이는 소리 등 의성어와 의태어를 살렸다. 17일 공연 전엔 시각장애인 관객을 위한 터치 투어(Touch Tour)도 마련된다. 공연 전 관객들이 무대에 올라 해설자의 설명과 함께 무대와 소품 등을 직접 만지고 느껴볼 수 있는 자리다.

음악극 <합★체>의 한 장면. 국립극장 제공

음악극 <합★체>의 한 장면. 국립극장 제공

공연 프로그램북 역시 점자책으로 제작했다. 소설 원작에 쓰인 ‘난쟁이’라는 표현에 대한 제작진의 고민은 프로그램북의 안내 문구에 담겼다. 작품의 표현상 이 단어를 사용하지만, 올바른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

김지원 연출은 지난 14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프레스 리허설에서 “무장애 공연을 추구했지만 완벽한 ‘무장애’ 공연은 없고,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다는 것을 느낀 작업이었다”며 “조금씩 양보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것, 그렇게 소통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무장애 공연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극단 다빈나오의 상임 연출가로 장애예술인들과 다수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온 그는 “관객들이 다양한 사람과 문화, 언어가 공존하고 있다는 감각을 이 공연을 통해 느꼈으면 좋겠다”며 “무장애 공연이 하나의 장르로 관객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음악극 <합★체>의 한 장면. 국립극장 제공

음악극 <합★체>의 한 장면. 국립극장 제공

“왜 하필 작은 공이야? 난쟁이는 큰 공 좀 쏘아올리면 안 돼?”

난쟁이라 불리던 아버지의 죽음과 사람들의 시선으로 “작은 것은 곧 불쌍한 것”이라 여겼던 형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황당한 수련을 시작했지만, 이 모험을 거치며 조금씩 변화한다. 합과 체는 생전 아버지가 말했던 ‘좋은 공’의 조건, “땅에 떨어져도 다시 튀어오를 수 있는 힘”과 같은 내면의 회복 탄력성을 찾아간다. 계도사의 장담처럼 극적으로 키가 자라진 않더라도, 넘기 어려워 보이던 장벽에 부딪혔던 쌍둥이 형제는 부딪히고 튀어오르며 새로운 해법을 찾아낸다. 작지만 큰 공을 쏘아올렸던 아버지의 유산은 공연 말미 합과 체의 농구 경기 장면으로 뭉클하게 이어진다.

7인조 밴드가 연주하는 경쾌한 음악과 개성 넘치는 캐릭터, 배우와 수어통역의 호흡 등 여러 요소요소가 조화롭게 ‘합체’된 공연이다. 공연은 15~18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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