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멸하는 세계 속 거꾸로 걷는 순례자···연출가 정진새 “가상·현실 뒤섞인 혼돈에 대한 연극적 증언”

선명수 기자

연출가 정진새 신작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팬데믹·기후위기·온라인 시대 비춘 부조리극

“실재의 기반이 무너진 세계” 속 혼돈 그려

극작가이자 연출가 정진새의 신작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극작가이자 연출가 정진새의 신작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속 ‘순례자’는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저마다 구원을 찾으려는 이들이 세계의 서쪽 산티아고로 갈 때, 순례자는 이 길의 끝에서 홀로 북동쪽 시베리아로 향한다. 구원이나 희망의 순례가 아닌, 그 반대의 방향으로 간다면 무엇이 나올까. 거꾸로 걷는 순례자 ‘그’에게 점차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다. 오호츠크 해상 기후탐사선의 연구원 ‘AA’와 ‘BB’는 위성 레이더를 통해 점멸하는 불빛처럼 이어지는 그의 여정을 지켜본다.

지난해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을 수상한 극작가이자 연출가 정진새의 신작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은 팬데믹과 기후위기 등 전지구적 위기와 마주한 인류의 실존적 회의를 담은 부조리극이다. 연극의 배경은 ‘2020년 그 이후 언젠가’. 게임 캐릭터를 통해 세계를 여행하는 온라인 관광 상품이 유행하는 가까운 미래다. 이 가상현실 게임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면 유저들은 ‘천국’을 얻어내는데, 모두가 찾는 산티아고길의 출발점에서 거꾸로 동쪽을 향해 가는 한 캐릭터가 발견된다. 곧이어 이 순례자가 가상이 아닌 현실에서도 시베리아로 걷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순례자를 위성 레이더로 관찰하는 두 기후 연구원의 대화로 이끌어가는 연극엔 실재와 허구가 혼재돼 있다. ‘그’는 왜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는 걸까. 산티아고 순례의 끝에 ‘천국’이 있다면, 그 역방향의 끝엔 ‘지옥’이 있을까. ‘그’는 실재일까 허구일까. 추측과 혼란이 뒤섞인 대화는 자주 끊어지고, ‘그’를 포착한 위성 레이더처럼 조명은 자주 점멸한다. 작품 속 인물은 말한다. “세상이 깜빡거리는데,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정진새 연출. 국립극단 제공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정진새 연출. 국립극단 제공

2일 개막을 앞두고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만난 정진새 연출은 “팬데믹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된 구원과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들, 그간 인류가 쌓아온 문명과 이에 대한 믿음이 더이상 유효한가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며 “종교적인 이유나 자기성찰, 구원을 바라며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전유해 그곳을 거꾸로 걷는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연극은 “실재의 기반이 무너지는 기후위기와 온라인 시대”, 인간이 직면한 좌절과 무력감을 그려 보인다. 연극은 실제 현실과 게임 속 가상현실을 의도적으로 섞어놓는다. ‘그’의 시베리아 순례에 열광한 대중은 이를 반영한 또 다른 온라인 현실을 만들어내고, 수백만명의 유저가 ‘그’와 동행한다. 극이 진행될수록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뒤엉키며, 단언할 수 있는 ‘실재’는 희미해지고 모호함만이 두드러진다.

정 연출은 “팬데믹이 도래했을 때, 온라인으로 현실이 무한하게 확장되던 그 시간이 굉장히 아득하고 한편으로는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혼재된 세계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 중 무엇이 옳고 그르다 식의 이분법적 접근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그 뒤섞임과 혼란을, 현실과 비현실을 다루는 연극 예술가로서 어떻게든 증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습니다.”

연극 속 잦은 암전은 점멸하는 세계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정 연출은 “암전이라는 연극의 관습적인 효과가 이 극에선 다른 의미로 작동한다”며 “암전이 이야기의 전후 이어짐을 강제로 중단시키기도 하고 관객에게 불편함과 낯설음을 주기도 하지만, GPS에 나타나는 순례자의 모습처럼 깜빡이고 흐릿한 세계를 보여주는 이미지로 감각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이 깜빡임 속에서 순례자를 지켜보는 두 연구원이 나누는 대화는 맥락없이 겉돌고 때로는 파편적으로 흩어진다. 정 연출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속 인물들이 2차 세계대전 후 황폐화된 세계에서 난민과 같은 막막한 존재들이었다면, 팬데믹과 기후위기 시대에 세계의 변이를 가장 크게 감각하고 있을 사람들이 기상 과학자가 아닐까 상상했다”며 “고립된 기상관측선 안 이들의 시시콜콜한 대화 속에서 현재의 부조리함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 연출은 “휴머니즘의 긍정이나 재확인,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이번 작품을 완성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극중 ‘정체성의 위기가 아니라, 비현실의 위기’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이제 질문을 좀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요. 작품 속 두 과학자는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부는가’를 묻고 그 질문에 대한 명료한 답을 내립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답은 이미 인류 문명이 내렸다고 생각해요. 제가 궁금한 것은 이렇게 되어버린 지구에서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후의 세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국립극단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공동 제작한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은 지난달 20~23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에서 첫 선을 보였다. 11월 27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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