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덕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자 문맥에서 서구 문맥으로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손님 언어로 된 원저술과 주인 언어로 된 번역 사이에 필연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뜻일 터이다. 번역은 순수언어의 꿈이라는 말도 있다. 하나의 언어에 폐쇄된 사고나 개념들이 번역에 의해 보다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지평으로 유도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테면, 영어의 Subject에 해당하는 주체라는 말만 하더라도 문맥에 따라 주어, 주체, 주인, 신민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데, 본디 그 말이 우리말에 있어서 짝을 지운 것이 아니라는 데 사정의 복잡함이 있다. 오히려 번역적 상황에 의해 소위 ‘주체’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 의제가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번역은 각각의 국가와 그 언어를 틀짓고 고정시키는 한편, 개별 국어의 세계에 균열을 내고 그 틈으로 새로운 지식을 이입한다. 순수하면서도 반역적이고, 실천적이면서도 폭력적인 것이 번역이다.

▲ 한자·서구 문맥이란 번역의 극점
역사적 주체의 입장 차이에 따라
한국의 번역어들은 크게 흔들려

▲ 번역어에 새겨진 한국 근현대사
민중들 삶의 철학 담긴 ‘중간어’
잊지 말고 주체화하라고 역설

■ 1930년대 전후로 한자·영어 중심으로 양분

우리가 번역한 근대는 크게 보아 1930년 전후까지의 한자어 중심의 한자 문맥(漢文脈) 번역어 시대와 1930년대 이후의 모더니즘 문명에서 시작해 미국에 의한 세계 재편을 기화로 강화된 영어 중심의 서구문맥(歐文脈) 번역어 시대로 양분될 수 있다. 공화, 민주주의, 문화, 진화, 국가, 대중, 사회주의, 철학, 민속, 국제, 세계 등의 이른바 개념어들은 실상 한문맥(漢文脈)에 의한 번역어의 세계를 표시하는 말들이다. 또 흔히 외래어로 분류되거나 번역(translation)과 구별해 음역(transliteration)이라고도 간주되는 뉴스, 아나키즘, 카페, 에로틱, 모던, 프로파간다, 아메리카, 아시아, 히스테리, 앙가주망, 오리지널, 테러 혹은 요즘 많이 쓰는 유비쿼터스나 에스엔에스 등의 말들은 서양적 원천을 전면화시킨 구문맥(歐文脈) 중심의 개념 세계라 할 수 있다.

한자 문맥과 서구 문맥이라는 번역의 양 극점은 정치적 입장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천하 질서를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 체제를 중시할 것인가 하는 입장의 차이에 따라, 또 전통을 중시할 것인가 근대를 중시할 것인가 하는 입장의 차이에 따라 한국의 번역어들은 흔들렸다. 물론 양자 모두 일국을 넘은 공유체(cosmopolis)나 문명 번역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음도 사실이지만, 근대계몽기나 식민지 시기, 또 미군정 이후의 현대 한국의 변화를 생각해보면 번역어의 변화는 그 자체로 역사적 주체들의 변화를 반영한다 하겠다. 오늘날에는 한자어에 한글 조사·어미를 넣어 쓰는 국한문체보다는 영어를 섞어서 쓰는 ‘영주국종(英主國從)’의 말투와 문체, 나아가 영어 그 자체가 학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흔히 한자는 본래 우리 문화 유산이자 동아시아 공동의 자산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임오군란 후 이루어진 조선과 청국 간의 ‘조청상민대육무역장정(朝淸商民對陸貿易章程)’을 보면 “살피건대 조선은 중국의 속국으로… 속국이 대국의 ‘문자를 함께 쓰는 우의(同文之宜)’를 밝히고 한 집안(一家)으로서 주인을 함께 모시는 정을 두터이 해야 할 것”이라 하여 한자를 제국주의적으로 변질된 천하 질서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 ‘한성주보’ 편찬에 관여했던 일본인 기자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 역시 “한자와 언문의 혼합문을 써보면, 일본과 조선이 진정 동문동어(同文同語)의 나라라 느껴져 기쁜 바 있었다”라고 하여, 한자어와 어순의 문제를 제국주의적 야심의 지렛대로 삼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메이지 일본에서 생산되어 총독부로 대변되는 교육 권력을 통해 한국 사회에 전파된 바, 동문동종(同文同種)론은 일본 대동아공영권의 핵심 논리이기도 했다. 미군정기 이후의 냉전 상황과 숭미주의가 만나 생산된 영어 원천의 외래어 개념들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중국어 근대 개념, 보다 더 많은 경우는 일본어 근대 개념을 한국어식으로 읽어 나가는 중역(重譯)의 세계야말로 근대 한국의 담론이었고, 이러한 매개 권력과 전통의 무게가 단번에 걷히면서 미국이라는 세계 체제의 주권적 힘이 현대 한국의 개념 세계를 재조직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념으로 읽는 한국 근현대](3) ‘번역’

■ 이중어사전, 번역어 변화에 좋은 참고 자료

번역이 형성해온 한국의 근대, 혹은 번역어에 의해 구성된 근대 한국의 학술 및 일상 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소위 근대 이후 만들어진 ‘이중어사전’이라는 자료군이 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영한사전이나 한영사전, 한불-불한사전, 한일-일한사전, 라틴어사전 등등이 다 외국어와 한국어 사이의 대역(對譯) 관계를 등가성의 원리에 의해 제시한 이중어사전들이다. 주로 성서 번역이나 식민 당국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사전이 갖는 규범성과 일목요연함으로 인해 번역어의 변화를 보는 데 적잖이 좋은 참고가 된다.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선교사 제임스 게일은 이중어사전을 편찬한 한국어학자로서도 기억될 만한 사람이다. 1897년 <한영자전>을 출간한 게일은 성서 번역 초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당시의 한국어를 “교리서를 번역하기는 어렵고 생활의 단순함을 표현하는 자연어에 가까운 언어”라 규정했다. “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표현하는 데에는 상당히 힘들지만, 복음서 표현은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이다. 일상 표현은 많지만, 추상 개념은 부족하다는 뜻일 것이다. 반면 허버 존스는 1914년 <영한사전>을 편찬하며, “국문(Kukmun)으로 정의를 작성하기보다는 영어 용어에 대한 등가어를 찾는 데 치중”했다고 말한다. 교육 제도상에서 총독부가 차지하는 위치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던 존스는 당대 일본에서 쓰던 많은 어휘들을 영어 표제어의 한국어 해제로 차용해 왔다.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일이었지만, 존스 사전의 수많은 번역어들은 여전히 현대 한국어 사전에 살아 숨쉬고 있으며, 이미 실험이 아니라 국어의 주요 성분이 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선교사가 하나같이 중국에서 출간된 이중어사전이나 일본에서 출간된 이중어사전들을 참고하며 해제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다.

근대에 이르러 국어의 비중이 커졌을 것 같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번역이 근대적 지식의 창구였기에 한자 개념은 폭증했다. 한국어와 서구어 및 일본어가 한자를 매개로 사실상 일대일 관계를 형성하면서, 한국과 세계는 “번역 가능한” 단위로 재편되어 갔던 셈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표 참고) 위의 표는 1890년부터 1925년까지 출판된 영한사전에서 공통된 영어 표제어를 골라 그 풀이의 변화를 제시한 것이다. 풀이하는 식의 유비적 대역 관계가 등가성을 바탕으로 한 일대일 대역 관계로 변화되는 과정이 일목요연하다. 예컨대 아끼는 것·절용하는 것(economy)과 같이 개념의 내포를 ‘풀이’하거나, 학문·격물궁리(Philosophy)와 같이 전통적 개념에 유비되어 제시되던 한국어는 대체로 1910년을 전후해 현재의 개념어들과 거의 유사한 한자어번역어로 안정화되어 간다. 한자 문맥과 서구 문맥이 만나는 지점으로서의 번역 한자어가 세계 규모의 지식 체계와 개념을 매개하는 경향이 뚜렷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적 안정성은 영어에 대응하는 한자 개념의 ‘이상화(理想化)’, 이념적 추상화 경향을 동반하였다. 한자 번역어로 이루어진 개념어의 세계와 일상이 분리되는 소외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근대를 상징하는 ‘Progress’라는 단어는 그 전형적 사례이다. 본래 ‘앞으로 가오’ ‘더 가오’ ‘나아가오’와 같이 방향과 운동에 관련된 중립 표현으로 풀이되던 이 단어는 ‘낫다’ ‘자라가다’ ‘늘어가다’와 같이 긍정적 고유어 표현을 거쳐 점차 ‘진보’ ‘전진’ ‘개진’ ‘발달’ ‘향상’과 같은 이상화·추상화된 번역어로 안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민주와 민중이라는 ‘진보 가치’도 생겨났지만, 이른바 ‘전진!’을 외치는 ‘하이 모던’ 세계가 돌격 근대화라는 모습으로 현실화된 것도 사실이다.

‘individual’과 같은 경우는 더욱 드라마틱하다. ‘하나’ ‘놈’과 같은 고유어 표현은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개인’ ‘단독’ ‘개인적’과 같은 표현으로 변화된다. 촌극 같지만 실상, 두 번역 사이의 우열을 가리거나, 적합성을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individual’의 본래 뜻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in+dividual)’이라는 의미고, 따라서 하나 혹은 놈이라는 번역 역시 결코 ‘반역’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추상화된 번역어가 고유어를 하위 계급의 언어로 추방시킨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된 개념들은 수동적으로 보면 세계 체제의 반영 혹은 제국주의적 폭력의 증거이고, 능동적으로 보자면 세계 체제 속의 주체적 행위이자 실천이라 할 수도 있다.

■ 번역은 타자를 직시하고 자기를 가다듬는 과정

오늘날의 한국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프로그레시브하다’거나 ‘크리에이티브’하다는 식의 소위 ‘보그체’(패션 잡지의 외래어 문체로부터 생긴 개념)를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번역하는 근대를 훨씬 뛰어넘은 영어마을들이 대학마다, 도시마다 자리하는 형편이다. 어느 쪽이든 몸에 와 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위 구문맥(歐文脈)과 한문맥(漢文脈)이 결합하면서 코즈모폴리턴 언어 사이의 ‘절합’이 일어났고, 바로 그 자리에 한국의 근대사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국어를 사랑하자거나 우리의 철학을 하자는 주체적 주장이 그 자체로는 옳은 말이지만, 국어든 철학이든 주체든 그 자체가 근대에 만들어진 번역어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기에, 타자를 직시하고 자기를 가다듬는 번역이야말로 주체화의 한 과정이었을 수 있다.

한국에서 번역은 무엇보다 ‘정치’ 그 자체였다. 중화주의와 제국주의, 민족주의와 옥시덴털리즘(occidentalism·서양주의) 없이 근대 한국의 번역사, 한국의 개념사를 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체의 위기를 느끼는 사람들은 이를 ‘번역된 근대’ 혹은 ‘중역된 근대’라 이야기하고, 보다 긍정적인 실천적 함의를 보는 사람은 ‘번역한 근대’라 주장한다. 그렇다고 할 때, 모든 개념어가 번역어는 아니라는 사실, 추상어만이 ‘선도 개념’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새삼 주목을 요한다. 개벽, 친일, 새나라, 모리배, 양키, 광주, 우리, 이웃과 같은 이름들 역시 근대 개념이 될 수 있다. 번역어에 새겨진 한국의 근현대사는 오히려 바로 이러한 민중들의 삶의 철학이 담긴 소위 ‘중간어’들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한 놈’ 혹은 ‘앗기는 자’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앞으로의 한국 개념어 연구의 한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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