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조선시대 ‘사초실종’, 잃어버린 25년

이기환 선임기자

“선왕조(선조)의 실록은 찬출해야 하는데…. 평시의 사초책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전혀 근거할 바가 없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혹 사대부가 보고 들은 바를 모으기도 하고, 혹은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는 일기(日記)를 거둬 들여서라도 막중한 일을 해야 합니다.”

1609년(광해군 1년), 춘추관이 “큰일났다”는 상소를 올린다. <선조실록>을 편찬해야 하는데 평시의 사초책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실록 편찬위원(유사당상)인 신흠(1566~1628년)은 <상촌휘언>에서 ‘사초실종’의 내막을 전하면서 분통을 터뜨린다.

“정묘년(1567년·선조 즉위년)~신묘년(1591년·임진왜란 직전)까지의 역사기록이 깜깜한 채 징험할 수 없게 됐다. 임진왜란(1592년)을 겪으면서 사관인 조존세·박정현·임취정·김선여 등이 사초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이다.”(<상촌휘언>)

조존세 등 사관 4인방이 임진왜란 도중에 사초책을 불사르고 도망간 사실을 기록한 <선조실록>.

조존세 등 사관 4인방이 임진왜란 도중에 사초책을 불사르고 도망간 사실을 기록한 <선조실록>.

그러면서 실록청 총재관(편찬위원장) 이항복에게 대책이 없다는 듯 하소연한다.

“잃어버린 25년의 사적을 그날그날의 일을 다 찾아 기록하자면 10년이 걸려도 완성될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실록편찬은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신흠은 임시방편의 대책을 전한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역사가 먼저 망한 셈”

“명공거경(名公巨卿·고위관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알려져 있으니 이들의 행적을 ‘열전’처럼 기록하면 당시의 사적은 모두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초를 잃어 임금의 행적에 따라 서술할 수 없으니 신하들의 <열전> 형식을 통해서라도 <실록>을 편찬하자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편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소북파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옥사)로 실록청 인사들인 이항복과 신흠, 이정구 등이 축출됐기 때문이었다. 신흠은 이를 두고 “나라가 망하기 전에 역사가 먼저 망한 셈”이라고 분노했다. 이수광도 <지봉유설>에서 “20여 년 간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정사를 증빙하여 적을 수 없었으니 애석하기만 하다”고 한탄했다.

“시정기(時政記·정무 행정의 실상과 잘잘못을 기록한 1차적 역사 기록물)도 없고…. 게다가 나라에서는 야사(野史)는 금했기 때문에 개인이 갖고 있는 사고(史稿·개인이 작성한 역사책)도 없었다.”

그야말로 ‘사초실종’이 낳은 ‘잃어버린 25년’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임진왜란 초기, 즉 변란의 초기 역사도 엉성하기 그지 없었으니 약 30년 동안 조선의 역사는 ‘소략’과 ‘엉성’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선조실록>은 전체 221권으로 돼있다. 하지만 ‘사초실종’ 25년의 기록인 즉위년(1567년 7월)~임진왜란 직전(1592년 3월)까지의 기사는 불과 26권이다. 임진왜란 이후의 기사들도 변란 초기 기록이 부실할 뿐 아니라, 조잡하고 당파에 얽혀 불공정한 기록들이 많다. 따라서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형편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임금은 백성을 버리고 사관은 임금을 버리고

대체 왜 이런 참담한 비극이 일어났던 것일까. 내막을 더듬어보자.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들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다. 선조가 선택한 길은 ‘무조건 도망’이었다. 임금의 몽진길을 바라보던 백성들은 “나랏님이 백성을 버리면 누굴 믿고 살란 말이냐”고 목놓아 울었다. 신하들의 작태는 더 목불인견이었다.

“임금이 경성을 떠날 때 국가가 틀림없이 망할 것이라는 요사스러운 말이 퍼져~명망 진신(縉臣)들이 보신책을 품었다. 경성~의주에 이르기까지 문·무관은 겨우 17인이었으며 환관 수십명과 어의 허준, 액정원 4~5명, 사복원 3명 등만이 끝까지 떠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임금이 내관에게 ‘너희가 사대부보다 낫구나’라고 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1일조)

이 와중에서 ‘사관 4인방’도 임금을 헌신짝 버리듯 하고, 도망간 것이었다..

“조존세와 김선여, 임취정과 박정현 등이 도망했다. 사관들은 처음부터 임금을 호종하면서 임금의 침문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아들처럼 대했다. 6월1일 밤 임금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행을 결정하자 몰래 도망할 것으로 의논하고…. 이들은 먼저 사초책을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어둠을 타고 도망갔다.”

임금이 국외망명을 결정해버리자 임금이고 뭐고 살길을 마련해야겠다고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목이 달아나도 잡아야 할 사필과 버려서는 사초책’까지 불구덩이에 넣은 채 도망갔다니….

선조는 자식처럼 여기던 사관들이 보이지 않자 자주 주변을 돌아보며 걱정했다.

“어디들 갔나, 왜 안보여? 김선여가 탄 말이 허약하던데…. 걸어서 오느라고 뒤에 처졌나?”

조선 중기 학자 유희춘의  <미암일기>.조선시대의 개인 일기로는 가장 방대하다.<선조실록> 편찬자들은 실록편찬의 근간이 되는 사초책이 부실하자 <미암일기> 같은 사대부의 개인일기를 수집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조선 중기 학자 유희춘의 <미암일기>.조선시대의 개인 일기로는 가장 방대하다.<선조실록> 편찬자들은 실록편찬의 근간이 되는 사초책이 부실하자 <미암일기> 같은 사대부의 개인일기를 수집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다음 날 새벽 사관들이 도망갔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선조의 낯빛이 ‘참담’ 그 자체였다. 호종하던 신하들도 모두 분개했다.

“그 사람들, 뒷날 상(선조)께서 귀국하시면 어찌 살아남겠는가.”

한편, 밤사이 도망의 길을 택한 사관들은 그 길로 영남과 호남에 흩어져있던 가족들을 찾았다. 그들이 먹을 것을 찾아 고을을 돌면서 거짓 핑계를 댔다.

“주상께서 우리더러 물러가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실은 사초를 태운 것이 아니옵고…”

사실 그들이 25년 간의 사초를 정말 불태웠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관련기록들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록들은 그들이 불태운 것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적시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 기록을 보자.

“임취정 등 4명의 사관이 <일기>와 사초를 조치하지 않고 일시에 도망했다.”(<선조실록> 1592년 12월4일)

“(사관들이 도망가고) 난리가 평정된 뒤 그 때의 사초를 행재소(임금이 몽진중에 머물던 곳)에서 옮겨왔으나 전혀 수정하지 못했다. 세월이 오래되고 좀 먹고 못쓰게 되어 장차 없어질 운명에 놓이게 됐다.”(<선조실록> 1601년 7월2일)

1601년(선조 36년), 당시 이조판서 기자헌이 “‘사초 소각 사건’을 직접 해명해야겠다”며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상소의 내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박정현 등 사관 4명이 안주에서 도망칠 때 짊어지고 온 사초책을 그냥 두고 갔다는 것. 그래서 자신(기자헌)이 의주의 승정원으로 가져와 보관해두었다는 것. 그때 마침 쉬는 시간이 되어 휴식을 취하려 자신(기자헌)이 승정원 구청에 머무르게 됐다는 것.

선조가 몽진길에 피눈물을 흘리며 건넌 임진나루.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선조를 호종하던 신하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 치욕의 역사를 기록해야 할 사관들도 사초책을 불태운뒤(혹은 팽개친채) 달아났다. 선조를 마지막까지 호종한 문무대신은 불과 17명이었다고 한다.

선조가 몽진길에 피눈물을 흘리며 건넌 임진나루.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선조를 호종하던 신하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 치욕의 역사를 기록해야 할 사관들도 사초책을 불태운뒤(혹은 팽개친채) 달아났다. 선조를 마지막까지 호종한 문무대신은 불과 17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찢어진 휴지 3장을 주웠는데 마치 평안도 감사의 장계초(狀啓草) 같았습니다. 그래 쓸데없는 휴지라 여겨 주위를 살피디가 마침 불이 있어 신(기자헌)이 넣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전하의 행차가 쉬는 날이어서 동료들이 주변에 쭉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 신(기자헌)이 ‘내가 휴지를 불 속에 던져넣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원래 친했던 사이였던 주변 사람들이 농담으로 ‘당신(기자헌)이 사초를 불살라버렸네’하고 놀려댔습니다. 그것이 와전되어 마치 사관들이 도망가면서 사초를 모조리 불태웠다고 사실처럼 전해진 것 같습니다.”

농담이 소문이 됐고,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인양 겉잡을 수 없이 퍼졌다는 주장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초

하지만 선조 임금은 기자헌의 주장을 일축했다.

“길가에 버려진 사초를 주워 아무개 조신(朝臣·벼슬하는 신하)에게 주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불태웠는지, 버리고 도망갔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오십보백보 아니냐. 그렇게 변론할 필요없다.”

선조의 말은 핵심을 짚는다. 기자헌도 언급했듯 “사초는 사관이 반드시 지녀야 하는 물건인데 떠날 때(도망갈 때) 버리고 간 것”이 문제이다. 불태웠는지의 여부는 곁가지였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사초책은 버려졌거나(혹은 불태워졌거나) 해서 대부분 복구불능 상태였고, 남아있었다 해도 좀이 쓸고 훼손되어 제대로 된 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천인공노할 잘못이다.

또 하나, ‘목이 달아나도 사필을 굽힐 수 없다(頭可斷 筆不可斷)’는 사관의 책무를 헌신짝처럼 버린 결과는 어땠는가.

잃어버린 25년의 역사는 물론이고, 사관이 없어 재대로 기록하지 못한 임진왜란 초기의 기록을 확보하지 못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고초를 겪었다.

1601년(선조 34년) 특진관 이호민은 임진왜란 초기 사관들이 모두 도망간 뒤의 고초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592년 6월) 사관들이 모두 도망간 뒤 제가 급히 입시했습니다. 대신들이 저의 등을 떠민 것입니다. 그러나 난리 중이서 지필를 얻지 못해 맨손으로 입시한 탓에…. 지금은 (시간의 너무 흘러) 기억해낼 수 없습니다.”

아니 사관이 지필없이 입시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었을까. 그야말로 코미디 같은 장면이다.

■“개인 일기까지 모두 바쳐라!”

임진년 이전과 왜란 초기의 잃어버린 25년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 역시 역경이었다.

1609년 <실록>의 수정을 편찬하려던 실록청 총재관 이항복이 광해군에게 아뢴다.

“실록 편찬에 고증할만한 자료가 전혀 없습니다.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마침 고(故) 유희춘, 고(故) 이정형의 개인일기가 다행이 춘추관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정형의 일기는 15~16년 전에 기록한 단 1권 뿐이며, 유희춘의 일기는 너무나 소략하여 1만분의 일도 고증할 수 없습니다. 이외의 고증자료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항복은 여염의 사대부 집에 있는 ‘가장일기(家藏日記)’를 대대적으로 찾아내야 한다고 주청을 올린다. 만약 자발적으로 가장일기, 즉 개인일기를 올리면 상을 내리고, 올리지 않으면 벌을 내린다는 고육책까지 쓴다.

“임진왜란 이전에 벼슬아치들의 개인기록은 모두 바치게 하고, 사대부의 문집 가운데 시정(時政)에 관계된 것들은 모두 수집해야 합니다.… 또 외지의 각 아문에 고증할 만한 문서도 모두 실어 보내도록 할 것을 8도 감사들에게 급히 지시해야 합니다.”

이항복은 “배삼익과 이개, 이수준의 집에도 병란 이전의 조보가 보관되어 있으며, 유조인의 집에는 임진년의 <행조일기(行朝日記)>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면서 이들 가문에 대대적인 수집령을 내렸다.

■“도망자에게 사필을 맡길 수는 없느니라”

그렇다면 사관 4인방의 운명은 어찌 됐을까.

“어찌 도망간 자들에게 다시 사필을 맡길 것인가. 청요직은 절대 안된다, 외직이라면 몰라도….”

선조임금의 말이다.

사관 조존세, 김선여, 임취정, 박정현 등 도망간 사관 4인방은 모두 이산해의 문하인이며, 명문 세신이었다. 전쟁 후인 1601년(선조 34년) 이항복과 이호민 등이 “잃어버린 사책을 더듬어 다시 되살릴 수 있는 자들은 바로 저들”이라며 4인방을 다시 사관으로 추천됐다.

“나라가 멸망할지언정 사기(史記)는 멸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죄는 졌지만 그들이 사관 직에 있었을 때의 일은 그들로 하여금 수정하게 하면 어떨른지요?”

그러나 선조는 단칼에 일축했다.

“그들에게 사필을 맡긴다고? 안된다. 이런 무리에게 역사의 수정을 맡겨 국사((國史)를 욕되게 할 수는 없다. 예로부터 어찌 도망한 사람이 역사를 수정한 일이 있었던가. ”

명문세족의 자제들이라 4인방의 명예회복 요구는 끈질겼다. 예컨대 1601년 4인방 중 한사람인 박정현이 중국으로 떠나는 외교사절단(동지사)의 서장관(사절단장)으로 추천됐다. 그러자 선조는 비망기를 내려 “다른 인사를 추천하라”고 화를 낸다.

“서장관은 중국사신으로 가는 일행의 어사(御史)이다. 왕명을 욕되게 하는 인물이면 안된다. 그런데 어찌 감히 박정현(朴鼎賢)을 추천했는가. 박정현은 지난 임진란 때 임금을 버리고 사책(史冊)을 불지르고 도망친 자인데, 이제 또 명을 받들고 가다가 중도에서 도망치게 하려고 하는가. 중국 땅을 더럽히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 박정현 말고도 김선여를 여러차례 청현직에 천거하고 심지어 홍문관 관리로 천거한 것을 예로 들면서 “이는 권선징악의 법고가 없어진 것이며 인륜이 사라진 것”이라고 꾸짖었다.

■부귀영화는 노렸지만…

그러나 이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

박정현은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625년(인조 3년) 마침내 중국 사신단의 사은사로 낙점된다. 끈질긴 인사이다.

<인조실록>의 기자는 그런 박정현을 두고 다음과 같이 사론을 단다.

“사초를 불태우고 도망간 박정현은 선조 때는 끝내 복관되지 못했는데, 오늘날에 와서 표문을 받들고 청나라 사절단의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스런 일이다.”

박정현이 죽자 <실록>의 기자는 “거동은 조금 무게가 있으나 처신이 탐욕스럽고 더러웠다”는 논평을 달았다. 박정현 역시 형조판서·중추부지사를 지냈다. 임취정은 ‘4인방’ 가운데서도 가장 떵떵 거렸다.

“임취정은 힘을 다해 출세하려 했지만 외직을 전전했다. 그러나 광해군 때 이이첨 세력이 융성하자 조존세와 더불어 현직에 등용됐다. …임취정은 자기 형인 임수정의 첩의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 소용(昭容·내명부의 5번째 품계)으로 만들었다. 소용은 용모가 뛰어나고 약삭 빨라서 왕이 총애했다. 임취정은 그 덕에 승지가 됐다.”(<광해군일기> 1613년 9월25일)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여악(女樂)과 나희(儺戱)를 즐기는 임금의 비위를 맞춰 총애를 받았다. 10년 뒤에는 대북파의 영수인 이이첨과 비슷한 지위까지 올라 서로 알력이 생기기도 했다. 그는 병조좌랑-형조참의-도승지에 이어 이조참판-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조존세는 1599년 예문관 대교에 복직되었고, 1604년 선천군수로 재직시에 평안감사로부터 포상대상자로 상신되기도 했다. 이후 이이첨의 그늘 아래서 한성부우윤·동지의금부사에 이어 대사성에 올랐다.

김선여는 역시 1599년 검열·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예조좌랑에 이르렀다. 김선여는 그나마 “선조 임금이 돌아온 뒤에 수치스럽게 여겨 벼슬을 하려 하지 않았다”는 평을 듣기는 했다.

어떻든 이들 ‘사관 4인방’은 임금을 내팽개치고, 사초책을 ‘불구덩이에 던져’ 역사를 ‘멸망시킨’ 인물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실록>은 이들 4인방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사초와 임금을 버린’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500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과연 “나라는 (임진왜란에도) 망하지 않았지만 (그들 때문에) 역사가 망했다”는 신흠의 말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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