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지켜도 그만”…허울뿐인 표준계약서에 멍드는 ‘연예인 인권’읽음

이유진 기자

‘더 이스트라이트’ 폭로로 다시 불거진 인권침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마련한 ‘가수 중심 표준전속계약서’ 제18조에는 아동·청소년 연예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담겼다. 더 이스트라이트의 리더 이석철이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에서 소속사 프로듀서의 상습 폭행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10대 6인조 보이밴드 더 이스트라이트 멤버들.(위부터)  공정위홈페이지·연합뉴스·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

공정거래위원회가 마련한 ‘가수 중심 표준전속계약서’ 제18조에는 아동·청소년 연예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담겼다. 더 이스트라이트의 리더 이석철이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에서 소속사 프로듀서의 상습 폭행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10대 6인조 보이밴드 더 이스트라이트 멤버들.(위부터) 공정위홈페이지·연합뉴스·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

“솔직히 표준(전속)계약서대로 하면 손해인데 어느 소속사가 그걸 다 지키겠습니까. 안 지켜도 그만인데.”

표준계약서 거듭된 개정 불구
모든 조항이 권고사항에 불과
기본권 침해 제재 방법 마땅찮아

23일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에게 ‘표준전속계약서를 준수하느냐’고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10대 6인조 보이밴드 더 이스트라이트가 소속사 미디어라인 엔터테인먼트(미디어라인) 소속 프로듀서로부터 상습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연예계 인권침해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번 사건은 피해를 주장한 멤버들이 모두 미성년자들이고, ‘가요계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는 김창환 미디어라인 회장이 연루됐다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일각에서는 연예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보장 가이드라인인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전속계약서’가 유명무실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2016년 데뷔한 더 이스트라이트는 이석철(18·드럼, DJ), 이은성(18·보컬), 김준욱(16·기타), 이승현(16·베이스), 이우진(15·보컬, 피아노), 정사강(15·보컬, 기타)으로 구성됐다. 멤버 평균 연령은 만 16.3세다.

지난 19일 리더 이석철은 기자회견을 열고 “(연습생 시절인) 2015년부터 담당 프로듀서로부터 상습폭행과 인권유린을 당했으며, 미디어라인 김창환 회장이 이를 방조했다”고 폭로했다. 미디어라인 측은 폭로 직후 입장문을 내고 “담당 프로듀서의 과거 폭행 사실을 인정하고 사표를 수리했지만, 김창환 회장이 폭행을 방조한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석철 측은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을 방문해 해당 프로듀서와 김 회장을 폭행·폭행방조 등의 혐의로 각각 고소했다. 같은 날 오후에 미디어라인은 멤버 전원과 전속계약을 해지한다고 밝혔다.

연예계 인권침해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9년 공정거래위원회는 배우로 활동하던 장자연이 각종 접대와 폭행, 성상납에 시달렸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것을 계기로 연예인들을 위한 표준전속계약서를 마련했다. 가수 중심, 연기자 중심 2종의 표준전속계약서에는 전속기간은 원칙적으로 7년으로 제한하고, 소속사는 연예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공정위는 2011년 표준전속계약서를 개정하고 청소년 연예인의 기본권과 관련된 조항을 포함시켰다. 가수 중심 표준전속계약서(제18조)와 연기자 중심 표준전속계약서(제21조)에 신설된 ‘아동·청소년의 보호’ 조항은 연예매니지먼트사가 아동·청소년 연예인들에게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를 요구할 수 없으며, 과도한 시간에 걸쳐 일을 시키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이들 연예인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은 물론이고 학습권과 휴식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2014년에는 ‘을(연예인)의 인성교육 및 정신건강 지원’ 조항이 추가됐다. 연예인은 본인 건강에 이상신호가 감지되면 즉각 기획사에 활동 중단을 요청할 수 있도록 했고, 기획사는 연예인의 신체적·정신적 준비상황을 반드시 고려하도록 했다.

문제는 표준전속계약서의 모든 조항이 권고 사항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개별 연예기획사가 연예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더라도 마땅히 제재할 방법이 없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의 연예계는 기획사가 어린 나이의 사람들을 발탁해 훈련·데뷔시키는 데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서열문화가 결부되면서 비인권적인 갑을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은 구조”라며 “정확한 실태 조사를 한 뒤에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 급하지만
일부 기획사의 낮은 인권감수성
개선하는 게 더 시급하다는 목청도

일부 연예기획사의 낮은 인권감수성을 개선하는 게 더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더 이스트라이트 이석철·이승현 형제의 법률대리인 정지석 변호사(법무법인 남강)는 “폭행과 같은 인권침해는 계약서에 명시되고 안되고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벌어져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작가 대중문화평론가는 “표준계약서가 만들어지고 아이돌 산업이 거대해지면서 연예계도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며 “이번 사건은 상식 수준을 벗어난 극단적 사례로 폭행과 같은 명백한 인권침해는 어떤 경우에도 있어선 안될 일이란 인식을 가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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