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방구석 1열’ 시상식

이진송|계간 홀로 발행인

나만의 심사기준을 통과한 최고 작품은?

아이유가 부릅니다.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 흐르지 못하게 또 살짝 웃어. 내가 왜 이러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오늘 했던 모든 말들 저 하늘 위로~”(좋은 날). 여기에서 ‘오늘’을 ‘올해’로, ‘모든 말들’을 ‘모든 일들’로 바꾼다면, 2020년을 보내는 노랫말로 제법 잘 어울릴 것 같다. 벌써 12월이라는 사실에 눈물이 흐르지만, 웃지는 못해도 꾹 참아보자. 신문의 칼럼을 찾아 읽을 만큼은 어른이니까. 2020년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전례 없는 한 해였다. 연말 역시 이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일 것이다. 올 연말 모임은 없는 것으로 생각하라는 정은경 질병관리청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의 말을 기억하며, 1인 송년회를 제안한다. 그 코너 중 하나로, 1년간 나를 웃기고 울린 콘텐츠로 ‘방구석 1열 시상식’을 열어보자. 준비물은 나의 기억과 이불, 그리고 귤이면 충분하다.

‘방구석 1열 시상식’ 수상작 중 하나는 코미디 <정직한 후보>다. 적당히 속물적이고 야비한 주인공 주상숙은 개연성 있는 갈등과 사건 속에서 좌충우돌한다. 영화는 여러 여성 캐릭터를 적극 활용하며 ‘여성 정치인의 승승장구와 몰락 서사’의 함정을 피해간다.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제공

‘방구석 1열 시상식’ 수상작 중 하나는 코미디 <정직한 후보>다. 적당히 속물적이고 야비한 주인공 주상숙은 개연성 있는 갈등과 사건 속에서 좌충우돌한다. 영화는 여러 여성 캐릭터를 적극 활용하며 ‘여성 정치인의 승승장구와 몰락 서사’의 함정을 피해간다.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제공

시상식을 개최하려면 심사 기준이 필요한 법. 최근 일부라도 부정적 요소가 있으면 ‘빻았다’라는 표현으로 뭉개면서 작품 전체에 낙인을 찍는 방식이 SNS 등에서 유행하는데, 사실 무엇이 좋은·나쁜 콘텐츠인지 구별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준은 주관적이고 모호하며, 작품은 여러 층위에서 입체적이고, 어떤 감상자와 어떻게 교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오기도 하니까. 썩 올바르지 않았음에도 재미있었던 나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즐기는 행동 또는 떳떳하지 못한 쾌락)를 탐구해보면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다. 단순히 ‘클린’한 것, ‘빻은’ 것을 감별하여 작품을 평가하기보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이나 문제가 있는 부분을 두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확장’해보면 어떨까? 미디어 비평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확장하고 연결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재미있는 놀이다.

다양한 연령의 삶을 보여주나?
남성이 과일을 깎는 장면이 있나?
질문을 던지다보면 ‘비평’이 된다
여성민우회가 만든 ‘질문’들에
내 질문을 단 하나 추가 한다면
“그런 여자라는 표현이 있나”다

‘정직한 후보’의 주인공 라미란
적당히 속물적이고 야비한 정치인
“그런 여자 아니”라는 말 필요 없게
속마음을 훌러덩 드러내버린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 미디어팀에서 진행한 ‘오늘의 질문, 내일의 변화’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이 프로젝트는 ‘이름을 가진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하는가?’ ‘그 두 명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그 대화의 주제가 남자에 관한 내용 이외의 것인가?’로 유명한 벡델 테스트가 콘텐츠의 다양한 의미와 결을 담아내지는 못한다는 문제의식에 착안하여 출발했다. 이 테스트는 최소한의 장치이지만, 벡델 테스트 통과 여부가 반드시 작품의 성평등 감수성과 이어지지는 않는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온·오프라인으로 미디어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온라인 설문을 받았다. 콘텐츠에서 반갑거나 아쉬웠던 장면을 통해 질문을 만들었다. 새롭고 다양한, 더 많은, 구체적인,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당연히 여겨졌으나 당연하지 않은 질문들. 그 결과물은 소책자인 <오늘의 질문, 내일의 변화>로 발간되었고, 운 좋게도 발간 기념 토크쇼에 패널로 참여해서 볼 수 있었다.

<부부의 세계>에는 “돈 많은 남자에게 가방을 요구하고 관계를 맺는 젊은 여성이 꼭 등장했어야 했나요” 같은 질문이 따라붙었다.  JTBC 제공

<부부의 세계>에는 “돈 많은 남자에게 가방을 요구하고 관계를 맺는 젊은 여성이 꼭 등장했어야 했나요” 같은 질문이 따라붙었다. JTBC 제공

소책자에는 2020년을 강타한 <부부의 세계> <정직한 후보>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나 웹툰 <정년이> <남남>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 등을 둘러싼 대화와 질문이 실렸다. 예를 들면, <부부의 세계>에는 “가해자의 시각으로 연출한 폭력 장면이 꼭 필요했나요?” “여성 캐릭터의 경제력은 남성 캐릭터와 어떤 차이가 있나요?” “돈 많은 남자에게 가방을 요구하고 관계를 맺는 젊은 여성이 꼭 등장했어야 했나요?” “아이의 문제 행동은 꼭 엄마 아빠가 같이 살지 않아서인가요?” 같은 질문이 등장한다. 언급한 작품 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다루며, 참여자들은 “꿈과 야망을 가진 여성과 남성의 최후를 어떻게 그리고 있나요?” “여성 캐릭터가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나요?(사랑 말고)” “다양한 연령의 삶을 보여주나요?” “장애를 웃음 요소로 이용하나요?” “남성 캐릭터가 김치를 스스로 꺼내 먹나요?” “남성 인물이 과일을 깎는 장면이 나오나요?” 같은 질문을 던진다. 개인적으로 ‘남성 인물이 과일을 깎는 장면이 나오나요?’ 같은 질문이 사소하지만, 가사노동 분담 문제를 드러낸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본 작품 중에서 그런 장면이 있나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을 고를 때 특별한 기준이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사실 <부부의 세계>도, <SKY 캐슬>도 안 봐서 자격 논란(!)에 휩싸일 만큼 감상하는 작품 자체는 적은 편이다. 한 번 볼 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끝없이 의문과 질문, 추측이 엇갈린다. 그래도 내가 ‘오늘의 질문, 내일의 변화’에 단 하나의 질문을 추가할 수 있다면, 이것이다. “여성 인물이, 또는 여성 인물을 두고 ‘남들과 다르다’라거나 ‘저런 여자’, ‘그런 여자’라는 표현이 등장하나요?”

재미있게 보다가도 이런 대사가 나오면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식는다. 누군가를 특별한 존재로 표현하려는 의도는 종종 어떤 기준을 만들고 다른 존재와 차별화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차별화는 구별되는 존재를 멸시하고 깎아내려야 가능하다. 예를 들면 이제는 진부하지만 ‘속물’인 ‘악녀’와 대비되는, 남자 주인공의 배경이나 재력에 연연하지 않는 ‘순수’한 ‘여자 주인공’이 있다. “저 그런 여자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여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감싸면서 하는 “네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대사에서 밀쳐지고 모욕당하는 ‘그런’ 삶. 여기에는 사회가 멸시하는 모든 여성상이 들어갈 수 있다. 교육받지 못했거나, 매 순간 영리한 선택을 하지 못하거나, 너무 꾸몄거나, 지나치게 꾸미지 않았거나…. 백마 탄 왕자가 구해주지도 않으며,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비난받거나, 하찮으니 경멸해도 된다고 여겨지는 삶의 타자화를 나는 견딜 수 없다.

최근에는 만드는데 꽤 여러 면에서 공을 들인 티가 나는 작품을 보면 행복해진다. 내가 꼽은 2020년의 코미디는 라미란이 주연한 <정직한 후보>다. 이 영화는 정치적 야심이 큰 여성 정치인 주상숙(라미란)이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이 주 스토리이다. 여기서 주상숙은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야비하다.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시침 뗄 수 없이 처음부터 속마음을 훌러덩 까버리면서 내가 만든 질문을 후다닥 통과해 버린다. 그런데 코미디는 사실 어렵고 위험한 장르다. 무엇이 웃긴지, 누가 웃을지, 그 웃음이 누구를 상처 입히는지 결정하는 모든 회로가 권력과 촘촘하게 얽혀 있다. 여성 정치인의 승승장구와 몰락이라는 서사는 자칫하면 오락으로서의 ‘여성 몰락’, 즉 ‘사이다’로 흐를 위험을 내포한다. <정직한 후보>는 많은 장면에서 여성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 함정을 피해간다. 주상숙의 비리를 터뜨리는 언론의 데스크, 당내 경쟁자의 책사, 주상숙과 경쟁하는 라이벌 정치인은 제각각 확고한 동기가 있는 여성이다. 주상숙은 정의로운 남성에게 응징당하는 게 아니라, 개연성 있는 갈등과 사건 속에서 좌충우돌한다. 이 작품 역시 완벽하진 않지만(세상에 완전무결한 작품은 없으니 발견한다면 도망치세요) 새로운 시대의 코미디로 기꺼이 추천한다. 라미란의 불꽃 같은 연기력이 재난문자보다 더 자주, 웃음을 터뜨린다.

이진송|계간 홀로 발행인

이진송|계간 홀로 발행인

친구들과 온라인으로 올 한 해 좋았던 작품이나, 참을 수 없었던 작품, 인기 많았고 나도 좋아했던 작품의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 이전과 달라진 점, 그때는 명작이었고 지금은 망작인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나만의 질문, ‘올해의 ○○○’을 하나씩 만들어보자. 방구석 1열 시상식에서는 오래전 지극히 사랑했던 작품을 울면서 떠나보내는 취향의 장례식을 치르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먼지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바람을 채우는 재미, 제법 쏠쏠하다.

내가 만든 질문을 다른 작품에 한 번씩 갖다대 보면 알게 된다. 어떤 것은 찰떡같이 맞아떨어지고, 어떤 것은 질문에 부합하지만 묘하게 재미가 없고, 어떤 것은 질문에 당당하지 못해도 생각만으로 가슴이 뛴다는 것을. 그 질문이 단 하나의 절대적인 잣대가 아니니 당연하다. 하나의 질문은 그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훨씬 더 풍부한 질문을 발명할 테니까. 이러한 고민과 과정에서 더 나은 작품을 만날 가능성이 싹트겠지? 꼭 2020년의 작품이 아니라도 좋다. 내가 2020년에 봤으면 2020년의 발견이야, 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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