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음모는 없다, 뒤통수 때리는 개그가 있다

오경민 기자

웨이브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윤성호 감독 인터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웨이브의 오리지널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왕년의 스포츠스타 이정은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왼쪽부터 이정은의 남편 김성남(백현진), 이정은(김성령), 김수진 보좌관(이학주), 차정원 의원(배해선).  웨이브 제공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웨이브의 오리지널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왕년의 스포츠스타 이정은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왼쪽부터 이정은의 남편 김성남(백현진), 이정은(김성령), 김수진 보좌관(이학주), 차정원 의원(배해선). 웨이브 제공

스포츠스타 출신 여성 장관과 평범한 공무원이 주인공인 정치드라마
씁쓸한 한국 정치 풍경 유쾌하게 다룬 블랙코미디…대선 맞물려 화제

“본 드라마는 픽션이며 등장인물이나 기관명, 단체 등은 실제와 어떤 관련도 없음을 밝힙니다.”

매 화 이 문구로 시작하지만, 어떤 드라마보다 실존 인물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드라마가 있다. 김대중, 유시민, 김정은, 김여정…. 단체나 인물을 연상시키는 설정도 많다. “여성 대상 범죄는 없어져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남성들의 좌절감”이라고 외치는 ‘0선 중진’ 선거대책위원장(이름은 ‘위대남’이다)이 등장한다. 연예 매체 출신 기자와 변호사가 진행하는 유튜브 방송 ‘내로남불연구소’가 가짜뉴스를 만들어 낸다.

웨이브가 지난 12일 공개한 정치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상청) 이야기다. 드라마는 야당 지역구 의원이었으나 ‘거수기’ 노릇만 한 뒤 다음 공천에서 탈락한 이정은(김성령)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뤘다. 시작부터 좌충우돌이다. 정은의 남편이자 ‘유시민이 되고 싶은 잔잔바리’ 시사평론가 김성남(백현진)이 괴한들에게 납치당한다.

드라마는 조금은 씁쓸한 한국 정치의 풍경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1화에서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모여 차기 장관을 선임하기 위해 ‘손병호 게임’을 하는 장면은 풍자의 정수다. 쟁쟁한 후보들의 얼굴이 스크린 위에 떠오른다. 전임 장관이 성비위로 경질된 만큼 남자 먼저 ‘접는다’. 후보가 몇명 남지 않는다. 아들 군면제, 다주택, 위장전입, 탈세, 논문 표절 등에 해당되는 이들도 제외된다. 코로나19 유행 시기 회식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사람, 다음 대선판에 기웃거릴 사람까지 접으면? 아무도 남지 않는다. 엄대협 정무수석(허정도)은 논의 대상에 없던 이정은을 새로운 장관 후보자로 제안한다.

그렇게 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 80년대 스포츠스타, 제20대 국회의원이었던 이정은이 신임 문체부 장관 지명자가 된다. 이정은의 역량을 제대로 검증할 것처럼 보였던 청문회는 단 두 문장에 자리가 정리되며 헌정 사상 최단 시간 청문회로 기록된다. “어젯밤 8시쯤, 여의도 생고기에서 회식하신 의원님들 이 자리에도 계십니까? 어제 회식에 참석하셨던 추민우 의원께서 방금 전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진지할 땐 진지하다. <이상청>은 문화예술체육계 범죄 전담 수사처(체수처)라는 소재를 통해 체육계 성폭력을 정면으로 다룬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이들과 단호히 선을 긋는다. 서도원 정책보좌관(양현민)은 체수처 출범식에 체육계 성폭력을 증언하러 온 우가은(안다정) 선수에게 “저는 아직도 악몽을 꿉니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피해를 전시하라고 강요한다. 이 사실을 알고 서 보좌관을 즉시 해고하는 장면에서, 이정은은 비로소 장관으로서 자질을 증명한다.

<이상청>은 국회나 청와대가 아닌 문체부를 주 무대로 한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공무원들이 극을 끌고 간다. 정치를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 이름도 없이 ‘○○○의 보좌관’ ‘공무원1’ 등으로 등장했을 이들이다.

서울 영등포구 웨이브 회의실에서 지난 22일 만난 윤성호 감독.  웨이브 제공

서울 영등포구 웨이브 회의실에서 지난 22일 만난 윤성호 감독. 웨이브 제공

윤성호 감독은 “대통령, 국회의원, 검찰, 경찰, 언론이 연루된 정치 음모를 다룬 드라마는 훌륭한 스토리가 충분히 많아 이미 레드오션이었다. 그 얘기에서 항상 배제되는 공무원들을 다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비서진이나 공무원은 정치 드라마에서 국회의원 등의 지시에 ‘네’ 하며 대답만 하고 따르는 투명인간, 수족으로 그려진다. 실제로는 어떤 사람들은 지시에 따르지 않고 버티고, 어떤 사람은 절충한다. 그런 게 우리 삶에 다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두 여성 정치인이 가장 비중 있게 등장하는 것도 이 드라마의 차별점이다. 이정은의 적수는 검사 출신 야당 4선 의원 차정원(배해선)이다. 차정원은 청문회에서 이정은을 집요하게 공격하지만, 이정은이 대선 잠룡으로 떠오르자 ‘같이 사이즈 좀 키워볼까’ 궁리한다. 어리숙해 보이는 이정은이 누구보다 ‘끗발’ 있음을 알아보는 것도, 모든 것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은 이정은의 숨은 고생을 짐작하는 것도 차정원이다. ‘이정은이 너무 많은 것을 쉽게 얻어서 싫어하냐’는 보좌관의 질문에 차정원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답한다. “없거든, 그런 여자는. 쉽게 뭘 얻는 여자는 없다고, 이 나라엔. 이정은이라고 쉬웠을까? … 온갖 것들을 견뎠겠지.”

이정은은 난세의 영웅이 아니다. 윤 감독은 소시민 출신의 정치 영웅이 샛별처럼 등장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봤다. 이정은은 스포츠스타이자 지역구 초선 경험이 있는 인물로 그려졌다. 시민 앞에서 100% 솔직한 선인(善人)도 아니다. 그가 체수처 출범식에서 고백한 체육계 폭력 생존 경험은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각색한 버전이다. 정치인들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카드’로 내밀 수도 있겠다는 감독의 생각이 반영된 부분이다.

대선을 앞두고 이 드라마가 인기를 얻자 같은 작품을 두고도 ‘여당 비판 드라마다’ ‘현 정권 옹호 드라마다’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윤 감독은 “예상했던 상황이지만 어디를 비판하고, 어디를 올려주고 이런 의도는 전혀 없다”며 “(정치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게 있다면 조금 더 ‘늠름해지자’는 것이다. 조금 더 멀리 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어엿한 모습으로 정치를 하길 바란다”고 했다.

<이상청>에는 모든 판을 짜고 있는 설계자도, 어두운 세계에서 펼쳐지는 권력 암투도, 거대한 음모도 없다. 유일하게 뒤통수를 때리는 건 윤성호표 개그다. 드라마는 각종 장치로 시청자를 웃기면서도 ‘장관 남편 납치 사건’의 미스터리를 충실하게 풀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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