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윤석열의 안하무인과 유재석의 딜레마

위근우 칼럼니스트

길 위로 나가길 포기한 프로그램, 하고 싶은 말만 한 권력자

유재석도 살릴 수 없는 토크가 있다. 지난 20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편 이야기다. 요즘 가장 큰 고민에 대해 질문하자 “국민이 편하게 잘 살 수 있는 좋은 결과를 내놔야 되기 때문에 어떡하면 잘할 수 있는지 여러 가지로 고민도 한다”는 식의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답변이나 내놓겠다고 굳이 인기 토크 프로그램을 찾아온 사람에게 뭘 더 꺼내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나마도 젊은 시절 검찰에서 밥총무를 맡았던 이야기나, 친구 결혼식 함진아비를 하러 가는 길에 공부하기 싫어 읽은 법전 구석의 내용이 나와 9수째 사법시험에 붙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지난해 12월 KBS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밝힌 바 있다.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정권의 프로파간다보다는 횡설수설하는 ‘사장님 훈화’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거면 된 걸까.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재석도 살리지 못한 토크인 동시에 유재석이라 더는 살릴 수 없는 토크이기도 했다. 그는 상대방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순발력 있게 반응해주는 뛰어난 진행자지만, 또한 게스트 스스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이상적 모습에 최대한 맞춰준다. 대통령 당선인이 작정하고 딱 그 정도 수준의 모습만 보여주겠다고 해도 유재석이 따져 물을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먼저 자리에 앉아 “영광이죠?”라며 대통령 당선인이 숨길 수 없는 오만함을 드러낼 때 동공이 흔들리는 중에도 신사적 태도를 유지할 뿐이다. 이번 방송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건 그래서다. 국내 최고 진행자 유재석의 딜레마와 국내 최고 권력자 윤석열의 안하무인이 교차했다는 점에서. 그게 우연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난 20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출연 편에 대한 시청자게시판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해당 회차의 시청률은 일주일 전 3.9%보다 하락한 3.5%(시청률전문기업 TNMS 집계)를 기록했다.  tvN 제공

지난 20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출연 편에 대한 시청자게시판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해당 회차의 시청률은 일주일 전 3.9%보다 하락한 3.5%(시청률전문기업 TNMS 집계)를 기록했다. tvN 제공

윤 당선인의 <유 퀴즈 온 더 블럭> 녹화일 다음날, 한국일보는 시청자 게시판의 반발과 티빙 구독 해지 움직임을 전하며 ‘길 위에서 만나는 우리네 이웃의 삶’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라는 프로그램 기획의도와 윤 당선인 출연 사이의 괴리를 지적하는 기사를 냈다. 맞다. 대통령 당선인의 출연 요청은 길 위에서 만나는 이웃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사실 지난 1년여 동안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스스로 기획의도를 배신해왔다. 코로나19로 인한 비상시국에 어쩔 수 없이 스튜디오 토크쇼로 포맷을 변경했지만 이후 어느 정도 혼란이 잦아들고 KBS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의 김영철이 여전히 각 지역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에도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스튜디오를 고수했다. 길 위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벌어지는 의외의 웃음이나, 생애 구술사 수준의 동네 장삼이사들의 진득한 이야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14세 때부터 시작한 세탁소 일을 50년 동안 성실하게 이어온 우리 이웃의 사연처럼 길 위에서만 들을 수 있던 이야기를 대체한 건 유명인사의 성공담이나, 화제적인 인물의 휴먼 스토리, 인기 연예인들의 인간적이고 유쾌한 모습이다. 퀴즈를 맞히고 받는 상금 100만원이 과거엔 누군가의 평생 기억에 남을 기적 같은 선물이 될 액수였다면, 이제는 출연자 상당수가 흔쾌히 기부를 하는 액수가 됐다. 단순히 과거의 형식, 과거의 재미가 없어진 문제가 아니다. 이제 더는 연희동 골목 샤넬미용실의 할머니들, 목포 서산초등학교의 초등학생들이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멘트 ‘유 퀴즈(You Quiz)?’의 당신(You)이 아니라는 게 진정한 문제다.

굳이 인기 토크 프로그램 찾아와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은 윤 당선인
‘유재석도 못 살린 토크’로 이어져

길 위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유재석의 ‘경청하는 능력’과 만나
놀라운 폭발력을 만들어냈지만

스튜디오 속 유명인들과의 만남 땐
노골적 퍼스널 브랜딩 못 막는 등
‘필터링의 부재’라는 약점도 드러나

길 위의 목소리들을 경청하는 것
윤 당선인에게는 ‘현재의 의무’
‘유 퀴즈’의 지난 성취를 되새겨야

지난 20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출연 편에 대한 시청자게시판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해당 회차의 시청률은 일주일 전 3.9%보다 하락한 3.5%(시청률전문기업 TNMS 집계)를 기록했다.  tvN 제공

지난 20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출연 편에 대한 시청자게시판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해당 회차의 시청률은 일주일 전 3.9%보다 하락한 3.5%(시청률전문기업 TNMS 집계)를 기록했다. tvN 제공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유(You)’는 말하자면 경청할 대상이다. 유재석이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다. 이것이 거리에서는 놀라운 폭발력으로 이어졌다. 모든 미디어 재현과 담론이 서울 화이트칼라 중심으로 극도로 집약된 한국의 비대칭성 안에서 ‘그’ 유재석이 직접 서울 외 지역 곳곳 다양한 연령,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 각각의 이야기를 특유의 진행 능력과 함께 경청하고 TV로 전할 때 방송을 보는 우리 세계의 지평은 조금씩 넓어졌다. 하지만 이제 경청의 대상 ‘유(You)’의 자리에서 유재석이 아니더라도 이미 누군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명사들이 마이크를 쥔다.

물론 좋은 내용도 많다. 하지만 별다른 검증 과정 없이 유명 유튜버 카걸 부부를 섭외해 그들의 허위 경력에 고개를 끄덕여주다가 논란이 되자 제작진이 사과문을 올리거나, 역시 본인의 성공담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이상엽 현대차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부하 직원에게 폭언을 일삼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제작진의 안일한 섭외에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유재석의 경청은 양날의 검이 된다. 최근 출연한 유튜버 한문철 변호사에게 직업적 사명감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가 남초 커뮤니티의 여론에 편승해 소위 ‘민식이법 놀이’라는 말을 유행시키며 스쿨존 사고의 책임을 조심하지 않은 운전자가 아닌 아이에게 돌린 커다란 해악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과학적 검증이 되지 않은 필적학이라는 의심스러운 지식을 주장하는 출연자가 사회적 성공을 개인의 성향 문제로 치환하며 요설을 펼치는 중에도 유재석이 바로잡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남는 건 자신이 보이고 싶은 자아상을 충분히 디자인할 자원을 갖춘 출연자들의 노골적인 퍼스널 브랜딩이다.

[위근우의 리플레이]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윤석열의 안하무인과 유재석의 딜레마

여기에 유재석의 책임이 있을까. 그럴 수 있지만 적어도 이번 윤석열 출연 방송에선 아니다. 앞서의 명사나 주목경제 참가자들이 <유 퀴즈 온 더 블럭>과 유재석의 힘을 너무 잘 알고 기대하며 출연했다면, 윤석열은 지난해 유튜브 채널 ‘삼프로TV’에 출연했을 때처럼 프로그램에 대한 별다른 예습 없이 나온 티를 숨기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가 얻은 건 딱히 없고, 호감만 소폭 잃었을 확률이 더 높다. 다만 유재석이 불편하지만 필요한 이야기를 감당하는 진행자가 아니며 윤석열 측이 그를 만나는 데 별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일종의 딜레마가 생긴다. 유재석은 안전한 범위 안에서의 맞는 말, 신사적 태도로 광범위한 포용력을 획득했지만, 같은 이유로 그의 후광 효과엔 필터링이 없다. 윤석열 같은 게스트와의 만남은 아마도 피하고 싶은 일이겠지만, 그런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진행자가 되는 역설. 충분하거나 과도한 소통적 자원과 권력을 갖춘 이들이 그렇지 못한 ‘유(You)’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오히려 ‘유(You)’의 자리를 전유하는 공론장의 비대칭 안에서 유재석의 포용성은 기울기를 교정하기보단 오히려 증폭시킨다.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이 유쾌하지 않은 경험은, 그럼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직접 길을 걸어보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있다. 그런 당신(You)들의 목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인 게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지난 성취라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는 현재의 의무다. 하지만 <유 퀴즈 온 더 블럭> 방송 당일, 윤 당선인은 지역 민심 청취를 위한 지역순회를 하겠다면서 정작 지역 언론의 취재를 거부해 한국기자협회 소속 지역기자협회의 비판을 받았다. 지역의 목소리를 듣고 소통하지 않는 지역순회는 요식행위일 뿐이다.

길 위로 나가는 걸 한동안 포기했던 프로그램과, 길 위로 나서 직접 국민과 소통하는 대신 예능의 힘을 빌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려는 권력자는 가장 안 좋은 방식으로 길 아닌 곳에서 조우했다. 이것이 우연일까. 왜곡되지 않은 공론장과 좋은 정치는 상호보완적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답은 길 위에 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나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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