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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몸뚱이뿐인 노동자에게 보내는 응원”
숙자씨는 큰아이의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공사현장에서 페인트공들의 뒷일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묻은 페인트 얼룩을 쇠주걱 하나로 온종일 밀어대는 일이다. 숙자씨는 사람에 치이는 일 없이 내내 바닥을 마주하며 면벽참선하듯 하는 이 일이 다른 일보다 좋았다. 식당에서 일할 때처럼 손님들의 갑질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손목과 어깨, 종일 쪼그리고 앉았던 다리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 축축 처지는 고단함에 지친 숙자씨는 불현듯 ‘죽지 않을 만큼 교통사고나 나버려라’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정말로 숙자씨가 미처 내리기도 전에 버스가 갑자기 출발하면서 숙자씨는 땅으로 고꾸라지는 사고를 당한다.수상작인 최희명씨의 단편소설 ‘꽃비 내리는 날’은 노년 여성의 노동을 다룬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은 “오늘날 노년의 여성 노동이 겪는 사회적 현실을 극도로 현실적이고 핍진하게 그리면서도 이를 단순히 연민이나 염려의 시선으로 바라... -
완벽 이해 아닌 ‘임시 저장’도 괜찮아
무지의 즐거움우치다 다쓰루 지음 | 박동섭 옮김유유 | 266쪽 | 1만8000원우치다 다쓰루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무도가다. 고베여학원대학의 명예교수이면서 ‘개풍관’이라는 합기도장을 운영한다. 그가 주로 연구한 것은 프랑스 문학과 사상이지만, 영화와 예술, 철학, 사회, 정치, 교육 등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글을 써 ‘거리의 사상가’로도 불린다.<무지의 즐거움>은 우치다 다쓰루의 책을 여러 권 펴낸 유유 출판사에서 그에게 25개의 질문을 던진 뒤 그 답변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모든 질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배움’이다. 다독, 다작을 하는 그에게 생활에서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는지, 어떻게 ‘인풋’을 해야 그렇게 많은 아웃풋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묻는다. 학교와 합기도장에서 오랫동안 제자들을 가르친 그에게 ‘멘토와 멘티 혹은 스승과 제자의 바람직한 관계란 어떤 모습일지’ 묻는다. 한국 상황에 관해 조언을 구하는 질문도 많다. 한... -
사회가 정한 ‘환자다움’을 거부하다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김도미 지음 동아시아 | 360쪽 | 1만7000원“요새는 암도 별거 아닌 시대”라고들 한다. ‘한국의 암 생존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인류가 암을 정복할 날도 머지않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숫자로 확인되는 생존율과 별개로, 개인에게 암은 여전히 재앙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암에 걸린 사람에겐 어떤 역할이 주어진다. 이들은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아야 하고, 어디에 가거나 가지 않아야 한다. 촘촘한 규범 안에서 일상을 재배열하며 ‘절대 안정’을 취해 ‘완치’라는 골인 지점을 향해 그저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30대 중반에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진단받은 김도미는 한국 사회가 말하는 ‘환자 역할’에 반기를 든다. ‘지 쪼대로 아플 자유’란 무엇인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헤맨 끝에 에세이 한 권을 썼다. 저자의 표현대로 “‘광대 같은 병자’가 되어보자는 마음으로, 불만과 조소를 한껏 담아 쓴” <사랑과 통제와 맥주... -
이상하고 낯선 세계 탐험이 끝난 뒤…묘하네, 이 찝찝함
기묘한 이야기들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 최성은 옮김민음사 | 284쪽 | 1만5000원자연 속의 깔끔한 최첨단 단지 ‘트란스푸기움’에 근무하는 ‘최 박사’는 언니를 찾아 이곳에 온 ‘여자’에게 말한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여전히 침팬지이자 고슴도치이고 낙엽송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우리 내면에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그 본성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은 그저 작은 틈새, 존재의 미세한 균열일 뿐입니다.” 여자는 “어떻게 인간이 자신이기를 그만두고 싶어 할 수” 있는지 애타게 묻지만, 언니는 동생의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 아닌 무언가가 되어 어둠 저편으로 자취를 감춘다.<기묘한 이야기들>은 201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출신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단편집이다. 토카르추크의 단편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제목 그대로 현실에서 겪기 힘든 ‘기묘한 이야기’ 10편이 담... -
미국 민주주의를 병들게 한 결정적 순간들…이제 약이 필요하다
병든 민주주의, 미국은 왜 위태로운가토마 스네가로프, 로맹 위레 지음 | 권지현 옮김서해문집 | 160쪽 | 1만8800원미국의 민주주의는 시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2008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가 당선되자 도널드 트럼프는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2016년 대선에선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에게 전국 득표에서 뒤졌는데도 승리했다. 2021년에는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자 지지자들이 국회를 점거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프랑스의 언론인 토마 스네가로프와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원장인 로맹 위레는 <병든 민주주의, 미국은 왜 위태로운가>에서 미국 건국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짚어가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한다. 미국 정치 지형을 설명하는 지도와 인포그래픽을 함께 실었다. 저자들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를 6개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보여준다. ‘건국의 아버지’ 존 애덤스는 편지에 “민주주의는 낭비적이고 소진돼 사라진... -
평균율 연습 外
평균율 연습2022년부터 2023년까지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후 전면 개고를 거친 끝에 완성된 장편소설. 언어와 음악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관심이 서사화됐다. 주인공 수민이 이혼 후 피아노 학원에서 조율을 배우며 미래를 가꾸어나가는 회복의 과정이 담겼다. 김유진 지음. 문학동네. 1만6800원일상이 장르인스타툰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네 작가의 일상을 온(ON)과 오프(OFF)로 나누어 짧은 만화와 함께 수록했다. 일과 삶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아가는 네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일’이 어떠한 존재인지 돌아보도록 한다. 김그래 외 지음. 자음과모음. 1만8500원스피노자로 영국 소설 읽기<프랑켄슈타인>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여행기> 등 독자에게 익숙한 영국 소설을 스피노자 사유의 핵심 주제들과 함께 읽는다. 스피노자 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가 문학과 더불어 <윤리학>의... -
관조하는 삶 外
관조하는 삶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신작. 현대사회에서 잊힌 덕목인 관조적 삶을 재조명한다. 저자는 성취 욕망과 인스턴트식 도취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뭔가를 더 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나 세계의 참모습을 관조하라고 주문한다. 전대호 옮김. 김영사. 1만6800원카오스, 카오스 에브리웨어이론물리학자이자 기상학자인 저자는 최대 2주까지의 기상 상황을 예측하는 지금의 일기예보 시스템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학자다. 책에서 그는 날씨에서 시작해 바이러스, 경제, 국가 간 충돌 등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예측한다. 팀 파머 지음. 박병철 옮김. 디플롯. 2만7800원나의 인생만사 답사기유홍준 작가가 30여년 만에 내놓는 산문집. 금연 결심을 밝힌 ‘고별연’, 홍세화·김민기 등 오랜 지기들을 떠나보내며 쓴 추도사, 주례를 서준 리영희 선생에 대한 회고 등 다양한 지면에 발표됐던 산문들을 모았다. 자신만의 글쓰기 비법과 문장수업 이력도 공개했다. 창비. 2만... -
고구마는 ‘고구마’스럽더라도 끝내 해낸다
난독의 계절고정순 글·그림 길벗어린이 | 112쪽 | 2만원‘그깟 호기심’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고구마. 동물 흉내 내면서 방귀 뀌기, 코로 리코더 불기를 잘하는 엉뚱하고 발랄한 고구마에게도 마음속 깊이 숨겨둔 비밀이 있었으니, 바로 글자를 읽지 못한다는 거였다.머릿속에 괴물이 살고 있어 글자를 읽고 싶을 때마다 방해하는 듯하다고 생각하는 고구마는 학교에서 그저 공부 못하고 받아쓰기를 할 때마다 배가 아픈 아이였다. 비밀을 아는 언니와 학교 친구 상숙이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고구마는 늘 받아쓰기 0점에 나머지 공부를 면치 못했다. 고구마가 의기소침하고 속상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버이날 부모님께 편지를 쓸 때 짝꿍 편지를 몰래 따라 ‘그리’고선 “짝꿍의 마음까지 그대로 따라 그린 것만 같았다. 생각도 마음도 전할 수 없는 답답한 어른이 되는 걸까”라며 무서워하기도 한다.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고구마는 전교에서 가장 빨리 달리고, 벌레를 ... -
고도의 관심, 물끄러미
“물끄러미, 다른 존재는 못 보는 걸 본다. 못 닿은 것에 닿는다. 물끄러미는 놓치지 않지만 억압하지 않는 시선이다. 간섭하지 않지만 거두지 않는 시선이다. 물끄러미는 고도의 집중력, 고도의 관심이다. 열기도 냉기도 아닌 자연스러움이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중력이 모두 내부에 있어 겉으로는 안 드러나는 상태, 그러니까 식지 않은 명랑의 상태다. 선생님은 타인을 위해 가져야 하는 덕목이 명랑이라고 쓰셨다.” <물끄러미>(난다)이원 시인은 6년 전 작고한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을 회고한다. 시인은 선생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로 ‘물끄러미’를 꼽았다. 언젠가 툭 던지듯 전한 “이원은 별걸 다 신경 써”라는 선생의 말이 그에게는 내내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별걸 다 신경 쓰는 분주함이 나의 허약함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뒤척임이 많았는데, 선생님이 그 말을 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정말 괜찮아졌다.” 그 말은 ‘별걸 다 신경 쓰니 그만 써’라는 뜻도 ‘별걸 ... -
연극이 스키야키라면 진짜 주인공은 ‘우지’
오늘은 무엇으로 나를 채우지마쓰시게 유타카 지음 | 이지수 옮김바다출판사 | 176쪽 | 1만7500원190㎝가 넘는 장신에 길쭉한 얼굴. 평소에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환해지는 얼굴. 2012년부터 방영 중인 일본 드라마 시리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고로상의 이미지다.일본 배우 마쓰시게 유타카의 에세이 <오늘은 무엇으로 나를 채우지>에 실린 글들은 그가 연기한 드라마 속 고로상을 꼭 닮았다.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해 보이는 에피소드 속에 은근한 유머로 맛을 낸 글들이 부담 없이 읽힌다.그는 자신의 작품은 다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분위기 깨는 발언에 실망하시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무의미한 반성은 하지 않는 성격인지라 과거의 작품은 일절 보지 않는다.” 최근 유행하는 비하인드 영상에도 불만이 많다. 그는 무대의 뒷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는 방송 금지 용어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