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돈으로 산 '장애인 고용 의무'

국내 기업과 공공기관 등이 지난 5년(2016~2020년)동안 장애인 의무 고용 비율(공공 3.4%, 민간 3.1%)을 지키지 않고 낸 장애인고용부담금(이하 부담금)이 3조원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중에선 삼성전자가 748억원으로 압도적인 1위였고, 5대 그룹(삼성·현대차·SK·LG·롯데) 중에서도 삼성이 계열사 11곳에서 1311억원을 내 가장 많았다. 현대차그룹은 핵심 계열사인 현대차·기아가 장애인 채용을 늘려 부담금을 내지 않았지만 다른 계열사들은 여전히 거액을 내고 있었다. SK그룹은 최근 들어 빠른 속도로 장애인 고용을 늘리는 모습이었고, 롯데그룹은 5대 그룹 중 가장 성적이 좋았다.

경향신문은 2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지난 5년간 부담금 총액과 매년 부담금 상위 100개 기업 자료를 받아 그룹·업종별로 분석했다.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을 합친 전체 기업 부담금은 2016년 4574억원에서 지난해 7239억원으로 58% 증가했다. 장애인 고용의무 비율이 높아진 첫해인 2019년(공공 3.2%→3.4%, 민간 2.9%→3.1%)엔 부담금을 낸 기업이 8586개로 최다였고, 부담금도 7653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5년동안의 부담금을 합치면 3조1253억원에 이른다.

■삼성 5년간 11개 계열사가 1131억원 내

5대 그룹을 그룹별로 분석하니 삼성은 지난 5년동안 100위 안에 이름을 올려 본 기업이 11개로 가장 많았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삼성디스플레이, 삼성물산, 삼성SDI, 삼성생명공익재단이 매년 10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삼성전기와 삼성엔지니어링, 삼성전자 관계사인 삼성전자서비스, 삼성전자판매 등도 포함됐다. 제조업은 전 계열사를 아우르다시피 했다.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5년동안 낸 부담금은 1311억원에 달했다. 이 시기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던 시기였지만 삼성은 장애인 채용에 있어서는 눈에 띄는 개선을 이루지 못했다.

■SK는 개선 중, 롯데가 최고

현대차그룹은 주력 계열사인 완성차 업체 현대차와 기아가 장애인 고용에 신경을 쓰면서 5년동안 한 번도 부담금을 내지 않았다. 현대차는 3%대 초·중반, 기아는 3%대 중반의 장애인 고용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아직 계열사에선 인식 개선이 부족했다. 현대모비스(86억원)와 현대엔지니어링(57억원), 현대건설(53억원) 등 5개 기업이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고 돈으로 5년동안 246억원을 냈다.

SK그룹은 SK하이닉스를 필두로 ADT캡스, SK에코플랜트, SK텔레콤, SK(주), SK네트웍스 등 6개 기업이 5년동안 344억원을 냈다. 다만 최근 몇년동안 최태원 회장 주도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장애인 채용이 크게 늘었다. 지난해엔 100위 안에 SK하이닉스와 ADT캡스만 남았다. SK하이닉스의 순위는 2016·2017년 삼성전자에 이은 2위(44억원·59억원)에서 지난해 86위(9억원)로 뚝 떨어졌다.

삼성처럼 제조업이 많은 LG그룹은 LG전자 등 6개 회사가 5년동안 400억원을 부담했다. 그룹 자산 규모로는 4위인데 부담금 규모는 2위다. 주력사인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 LG화학이 부담금 대부분을 차지했다.

롯데그룹은 롯데건설과 롯데쇼핑만 각각 15억원, 10억원을 냈다. 적지는 않지만 5대 그룹 중에서는 현저하게 낮다. 롯데가 장애인 채용률을 지키려 가장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업별 1위는 항상 삼성전자

지난 5년간 삼성전자는 2위와 큰 격차를 보이며 기업별 부담금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214억원을 포함해 5년동안 총 748억원을 냈다. 웬만한 중견기업의 연간 영업이익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장애인 고용률은 2016년 1.67%에서 지난해 1.55%로 되려 떨어졌다.

2위는 5년동안 계속 5위 안에 머무른 대한항공(273억원)이었다. 3위는 학교법인으로는 가장 많이 부담한 연세대학교(216억원)였다. 4위는 KB국민은행(202억원), 5위는 근소한 차로 SK하이닉스(201억9100만원)였다.

■쿠팡·홈플러스·이마트…유통 기업들 이래도 되나

최근 몇년새 적자를 감수하면서 사업을 확장해 온 쿠팡은 2017년부터 10위권에 들기 시작해 매년 거액의 부담금을 내고 있다. 쿠팡주식회사와 자회사인 쿠팡풀필먼트서비스유한회사를 합쳐 5년간 장애인 고용 대신 135억원을 냈다.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홈플러스(163억원)와 이마트(82억)도 5년 내내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식품 기업인 농심(58억원)과 대상(53억원·청정원), 소비자들에게 착한 기업으로 인식돼 ‘갓뚜기’라 불리는 오뚜기(50억원)도 5년동안 100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밖에 코웨이(55억), 아성다이소(49억원), 코스트코코리아(34억원), 아워홈(40억원) 등 소비자에 가까운 렌탈·유통·식품 기업들이 부담금을 냈다.

■모범이 돼야 할 공공기관·대학마저

공공기관 중 매년 10위권에 드는 기관이 있다. 서울대병원이다. 지난 5년동안 124억원의 부담금을 냈다. 경북대병원도 5년 내내 이름을 올려 총 41억원을 냈다. 한국원자력의학원, 국방과학연구소, 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 등이 리스트에 올랐다. 지난해 새로 100위 안에 올라온 공공기관은 한국생산기술연구원과 충남대병원, 한국전력이었다. 다수 공공기관들은 장애인 고용 의무를 지켰는지 심사하는 연말에만 단기로 장애인을 고용하는 꼼수를 쓴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학생에게 민주시민의 책무를 가르치는 대학이 속한 학교법인들도 다수가 장애인 고용 의무를 돈으로 대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5년 내내 100위 안에 든 학교법인만 10개다. 연세대를 비롯해 일송학원(한림대·105억), 고려중앙학원(고려대·102억), 한양학원(한양대·81억), 인제학원(인제대·71억) 등이다. 1번 이상 100위 안에 든 학교법인을 꼽으면 18개나 된다. 여기엔 경희대·성균관대·이화여대·중앙대 등 유명 서울 사립대 다수가 해당된다. 이들은 정부에서 대학 운영지원금을 받아 상당액을 부담금으로 반납하는 셈이다.

시중은행들은 높은 순위에 대부분 포진해 있다. 4위 KB국민은행에 이어 6위 하나은행(191억원), 8위 우리은행(180억원), 9위 신한은행(171억원) 등 10위 안에 은행만 4곳이 있다. 그밖에 13위 NH농협은행(117억), 36위 씨티은행(62억), 42위 SC은행(56억)으로 대부분 시중은행이 장애인 고용 의무를 방기하고 있었다.

건설사들도 대림산업, 삼성물산, GS건설, 포스코건설, 대우건설, 현대건설, SK에코플랜트, 롯데건설 등 유명 건설사들이 대부분 포함됐다.

■엔씨소프트, 김앤장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카카오, 네이버 등 IT·게임 기업들은 순위 안에 없었다. 엔씨소프트만 44억원을 부담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게임사 중에 규모가 크고 개발자 위주 기업이라 장애인을 채용하기 어려워서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로펌 중에는 유일하게 김앤장법률사무소가 5년동안 부담금으로 44억원을 냈다. 회계법인 중엔 삼일·삼정·안진회계법인이 목록에 올랐다.

노웅래 의원은 “기업들은 기업이 클수록 의무 고용 인원이 많다고 하소연하지만, 현대차나 SK하이닉스 같은 큰 회사도 최근 장애인 채용을 늘려가는 걸 보면 결국 기업 의지의 문제”라고 말했다. 노 의원은 “장애인의 자립을 위해선 일자리가 필수적”이라며 “공공성이 높은 공공기관과 대학, 은행은 더욱 책임감을 갖고 장애인을 채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