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경향포럼

기본소득의 다른 이름 ‘공동체’…인간적이고 지속 가능한 ‘분배’를 고민하자

이승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기고

이승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승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J씨는 충남 보령시의 14개 섬 중 하나인 장고도에 40년째 살고 있다. 젊은 사람들부터 J씨와 같이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노인들, 중장년에서 고령층까지의 어부나 해녀 등 장고도에는 200여명이 함께 마을을 이루고 있다. 장고도는 해삼 양식에 주력하는데, 해삼은 종묘를 뿌리고 난 뒤에는 모두의 어머니인 바다가 알아서 키워준다고 한다. 마을 해녀들은 해삼 채취 노동에 대한 대가로 돈을 받고,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 중 일부는 해적 감시를 위해 순찰을 한다. 하지만 J씨와 같이 해삼 생산을 위해 별다른 노동을 하지 않는 대다수의 주민들도 수익을 똑같이 나눠 갖는다. 1993년 가구당 1년에 85만원으로 배당이 시작된 이후 지난 30여년간, 섬을 둘러싼 바다가 길러준 해삼과 전복으로 얻은 부는 이곳에 20년 이상 거주한 모든 집이 함께 기본소득으로 나눠 가져왔다. 2020년부터 시작된 바지락 배당은 노동에 참가한 사람만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힘이 좋아 하루에 40㎏은 캐낼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J씨처럼 고령이거나 집안에 사정이 있어 20㎏만 캐낼 수 있는 사람도 함께 작업하고 수익을 똑같이 나눠 갖는다.

2020년에 J씨는 굴 장사로 번 약간의 수익과 바지락을 함께 캐서 얻은 배당금 1000만원, 그리고 장고도 기본소득 1100만원을 합쳐 연간 총소득이 약 3000만원이 됐다. 마을 사람들은 해산물을 길러주는 바다를 함께 지키고, 마을의 누구도 굶지 않도록 서로를 보살핀다. 마을 사람들이 J씨를 돌보기도 하지만, J씨 역시 이웃을 함께 살핀다. 그리고 자신이 오랜 기간 살아온 아름다운 섬을 다음 세대가 잘 보호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 사람들의 일상적 활동은 데이터로 추출돼 소수의 기업과 자본가의 이익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 가치 창출이 새로운 형태의 공공 자원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상류층의 부는 이전보다 더 빠르게 축적되고 있지만, 하청노동자, 저숙련 육체노동자, 일자리를 찾는 청년, 돌봄이 필요한 저소득 노인, 소득이 일정치 않은 플랫폼 노동자, 감염병에 취약한 콜센터의 여성 노동자 등 노동 시장의 밑바닥으로 몰려 불안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초고령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와 사적 소유가 강조되는 가운데 원자화된 우리는 경쟁할 뿐이다. 공동체와 연대라는 가치는 잊혀지고 있다. 이러한 21세기 자본주의에서, 장고도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억해내야 할 ‘공동체’의 자유와 ‘모두의 것’인 커먼스(commons·공유지, 공유자산)에 대한 오래된 미래를 보여준다.

전통적 복지국가는 20세기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를 일부 해결했으나, 디지털 자본주의에서 부의 축적방식과 일의 모습이 변화하면서 불평등과 사각지대는 다시 확대되고 있다. 또 성장을 전제한 복지국가는 지속 가능한 녹색사회를 향한 경로를 보여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최근 한국에서 대안적 사회 정책으로 활발하게 논의된 기본소득은, 전통적 분배 정책에 대한 다양한 토론을 촉진시켰다. 그동안 지지부진하게 전개돼 왔던 사회보장제도 개혁에 대한 논의는 전 국민 고용보험, 안심소득, 기초자산제, 일자리보장제, 참여소득 등 다양한 대안들로 활발하게 더 확대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지난 대선과 코로나19 감염병 재난을 거치면서 소수 정치인과 정책가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기본소득이 ‘보편주의 대 선별주의’ 논쟁이나 정책공학적 차원의 논의에 갇혀버린 데 대한 성찰과 복기가 필요하다.

기본소득이라는, 책임과 자원에 대한 새로운 분배의 원리를 통해 더 인간적이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이 자극돼야 한다. 기술 발전으로 모두가 ‘연결’돼 있다지만 사실은 원자화된 개인들의 경쟁이 미덕인 21세기 자본주의라는 바다 위에,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공동체’가 저 멀리 어렴풋이나마 섬으로 존재하고 있다. 일부 소수 권력자에 의해 납치된 기본소득 논의를,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차원으로 귀환시켜 우리가 도달해야 할 미래를 그려보자. 기본소득의 다른 이름인, 우리의 오래된 미래 ‘공동체’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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