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량:죽음의 바다>와 파레토법칙
425년전 12월16일 새벽 남해바다 노량에서는 임진왜란 최대,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다. 전투는 해가 밝고나서야 끝난다. 시체와 판자, 무기, 갑옷이 뒤섞여 물이 흐르지 못한 관음포 앞바다는 붉게 변했다. 왜선 200여척이 침몰하고 왜군 1만3000여명이 사망했다. 조선수군의 최고 지휘관 이순신과 맞바꾼 전과였다.
<노량:죽음의 바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1598년 겨울 그 차가운 바다 위에서 벌어진 대혈전을 비춘다. 김한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노량:죽음의 바다>는 이순신 트롤로지(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명량>(2014)를 시작으로 <한산:용의 출현>(2022)에 이어 10년만에 긴여정이 마무리된다. 김한민 감독은 이를 ‘천행’이라고 표현했다. 여전히 역대 최다 관객 기록(1700만명)을 갖고 있는 <명량> 성공이 3부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힘이 됐다.
실제 역사적 시간 순으로 보자면 한산대첩(1592), 명량대첩 (1597), 노량대첩(1598년) 순이 된다. 그러니까 노량대첩은 12척으로 대승을 거둔 명량대첩의 1년뒤 이야기다.
<노량:죽음의 바다>는 스포일러가 따로 없다. 결론은 누구나 안다. 임진왜란 발발로부터 7년이 지난 1598년 왜군의 수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다. 그는 조선을 철군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명량해전 이후 조선수군에게 제해권을 빼앗긴 왜군들은 순천, 부산 등의 왜성에서 칩거하고 있던 상태. 퇴각을 하고 싶어도 바다에는 이순신이 버티고 있다. 전의를 상실한 왜군들은 뇌물로 명나라 도독 진린을 회유하지만 이순신은 단호하다.
“대장이 되어 화친을 말할 수 없으며 절대 이대로 원수를 내보낼수 없소”
선조도, 명군도, 왜도 이미 끝난 전쟁이라 생각했다. 이제 관심은 전후다. 선조는 왜란의 수습을, 왜는 다시 시작되는 권력투쟁을, 명군은 안전한 귀향을 떠올린다. 단 한 사람. 이순신만 빼고.
<노량:죽음의 바다>
<노량:죽음의 바다>는 스크린에서 좀처럼 보기힘든 해상 야간 전투장면을 담고 있다. 아군의 시점에서 적군의 시점으로 다시 아군의 시점으로 이어지는 백병전 롱테이크샷은 영화의 백미다. 역설적으로 이 장면은 이 전쟁이 얼마나 처절했는 지를 보여준다. 수족같은 장수와 적지 않은 병사를 잃으면서도 왜 이순신은 기어이 전투를 고집했던 것일까. 그는 말한다. “왜군을 완벽하게 섬멸하는 것이 이 전쟁을 올바르게 끝내는 것이다”
임진왜란 7년은 이순신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한민 감독의 말처럼 이순신은 용장(명량대첩)이면서 지장(한산대첩)이면서 현장(노량대첩)이었다. 영화 속 명나라 도독 진린은 북쪽의 대장별을 보며 말한다. “저 별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진작에 명운을 다했을 것이다”
<노량:죽음의 바다>
경제학에서는 소수가 세상을 이끄는 현상을 ‘파레토법칙’으로 설명한다. 파레토법칙은 상위 20%가 전체 생산의 80%를 해낸다는 것으로 이른바 ‘20대 80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이탈리아 경제학자인 빌프레도 파레토는 어느날 개미를 관찰했다. 모든 개미가 골고루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몇시간 지켜보니 소수의 개미만 열심히 일하더란다. 완두콩도 마찬가지였다. 소일거리로 심은 자신의 텃밭에서 자라는 완두콩을 봤더니 전체 열리는 완두콩 중 80%가 20%의 콩깍지에서 열렸다. 여기서 모티프를 얻은 그는 이탈리아 20%의 인구가 80%의 땅을 소유하는 현상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소수에게 영향력이 몰리는 현상은 자본주의에서 쉽게 관찰된다. 시가총액 상위 20%의 주식이 주식시장의 80%를 좌지우지한다. 프로야구 고소득 상위 20% 선수가 전체 연봉액의 80%를 차지한다. 백화점에서는 상위 매출 고객 20%가 80%의 매출액을 담당한다.
일상도 마찬가지다. 전체 운전자의 20%가 교통위반의 80%를 저지른다. 내가 보내는 톡의 80%는 입력된 이름의 20%에 보내는 것이다. 신발이 닳을때는 꼭 같은 부위만 닳는다. 즉 신발 바닥 면적의 전체의 20%가 주로 닳는다. 아무리 옷이 많아도 주로 입는 옷은 20%정도다. 신문이나 잡지를 볼 때 읽는 기사량은 전체의 20% 정도다. 스포츠 경기에서는 전체 경기시간의 20%가 결과를 결정한다. 이때문에 방송국은 하일라이트를 편집할 수 있다.
유통업체들은 파레토법칙을 활용한 마케팅을 선보이고 있다. VIP마케팅은 소수의 고소득 고객을 위한 전략이다. 금융권의 PB영업도 비슷한 형태다. ‘큰손’고객은 각종 재무상담을 무료로 받을 수 있고, 각종 행사에도 귀빈으로 초청된다.
<노량:죽음의 바다>
파레토법칙은 ‘선택과 집중’의 근거가 됐다. 엘리트 교육에 집중 투자하고 대기업과 대표산업을 집중 육성하는데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국가균형발전보다 강한 수도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전체를 1명의 천재나 기업이 먹여살리는 구조는 결정적 약점이 있다. 천재가 공백일 때 그간 쌓아둔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쏠림이 큰 만큼 리스크가 커진다는 얘기다. 적의 흉탄에 쓰러진 이순신은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말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으로 자칫 조선 수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왜적들의 사기가 올라 전투를 망칠 것을 우려했다. 이순신이 없는 칠전량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수출과 주식시장, 법인세수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삼성전자의 불황은 국가적 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주력제품에 ‘몰빵’하다가 한순간에 망해버릴 수도 있다. 스타 CEO가 물러나자마자 흔들리는 기업도 종종 볼 수 있다. 한때 애플은 창업주 스티브 잡스가 떠나자 위기에 빠졌다.
소수에 기대는 정치가 불안전한 것도 같은 이유다. 최고권력자 공백은 국가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는 이유다.
투자의 큰 원칙 중 하나가 ‘포트폴리오 투자’다. 계란을 한바구니에 담는 몰빵 투자는 레버리지를 크게 할 수 있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키운다.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투자의 고수들은 몰빵 투자를 즐겨하지 않는다.
<노량:죽음의 바다>
임진왜란은 이순신이라는 희대의 천재가 있어 위기를 극복했지만, 그런 행운은 다시 오지 않았다. 이후 조선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빠르게 국력이 쇠퇴해 간다.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는 쿠키 영상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났지만 북쪽의 대장별은 여전히 반짝인다. 낮에도 어찌 저렇게 반짝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광해는 이렇게 말한다. “아직 할 말이 남았거나 하지 못한 것이 남았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나”라고.
2023년 연말. 영화 <노량:죽음의 바다>가 한국사회에 남기는 메시지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