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와 고도침체(Godot recession)
지난달 중순부터 다음달 중순까지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공연된다. 출연배우인 신구, 박근형, 박정자, 김학철 등 4명 배우 연기경력을 합치면 모두 224년.
88세의 배우 신구는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은 연극이었는데,기회가 없었다”며 “이제 마지막 작품이 될 지 모르겠는데 과욕을 부렸다”고 말했다. 84세의 배우 박근형도 “대학 연극학부 시절부터 한번 해봤으면 싶은 작품이었다”며 “출연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말못하고 지나쳐 왔는데 이번에 운좋게 얻어걸렸다”고 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배우 신구는 에스트라공(고고)역을, 박근형은 블라디미르(디디)역을 맡고 있다. 이들 4명의 원로배우는 두달간 같은 역할의 배우를 두지 않고 모든 공연을 해내게로 해 더 화제가 됐다. 도대체 어떤 연극이길래 80대 명배우들이 기꺼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80대 명배우들을 무대로 끌어올린 ‘고도’의 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1953년 프랑스 파리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된 뒤 다양하게 변주되며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무대에 오르는 대표적인 현대극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국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1969년 극단 산울림의 임영웅 연출, 그의 아내인 오증자 번역가 역본으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이후 약 1500회 공연되며 22만명의 관객이 이를 지켜봤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각 사무엘 베케트의 2막극이다.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단촐함’이다. 희곡에서 제시하는 1막의 배경은 딱 세 문장으로 묘사된다. ‘시골길/나무 한그루/저녁때’. 2막의 배경은 하나도 변화가 없다. 희곡에는 ‘다음날/ 같은 장소/같은 시간’으로 씌여있다. 등장인물은 모두 5명이다. 에스트라공, 블라미디르, 포조, 포조의 노예 럭키, 그리고 소년이다. 90분간 5명의 등장인물이 같은 무대에서 이끌어 나가는 셈이다.
장화를 벗으려는 에스트라공 앞에 블라디미르가 들어오면서 연극은 시작된다. 두 사람의 대화를 하지만 대화는 처음부터 어긋난다. “장화를 벗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나는 가끔 희망이 온다고 느껴지네”라는 식이다. 당근을 준다더니 무를 주는 식이다. 이런 대화와 행동이 연극 끝까지 이어진다.
럭키를 긴 목줄로 맨 포로가 등장한다. 럭키는 무거운 가방과 접어두는 걸상과 소풍용 바구니를 운반하고 있고, 그 뒤의 포조는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이들의 대화도 행동도 앞뒤가 맞지 않다. 네명의 대화가 이어질 땐 대화와 행동이 뒤죽박죽으로 엇갈린다.
‘부조리극’의 대명사 되다
그래서 이 작품을 ‘부조리극’이라 부른다. 부조리극이란 아무 의미 없는 내용을 계속 반복하면서 인생의 무의미함과 고독 등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연극을 말한다. 전통적인 연극에 비해 사실성과 합리성이 결여되 있는 듯 보인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무대를 지키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고도’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블라디미르(디디) “갈 수 없어”
에스트라공(고고) “왜?”
블라디미르(디디)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네”
(출처: 고도를 기다리며/ 문예출판사/ 홍복유 옮김>
하지만 이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뭐하는 사람이지 모른다. 심지어 만나자한 이곳이 맞는 장소인지,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들은 그냥 기다린다.
만약 고도가 오늘 오지 않는다면? 블라미르는 말한다. “내일 또 와야지” 에스트라공이 맞장구 친다. “그리고 모레도. 쭉 계속해서. 그가 올때까지”
희곡 <고도를 기디라며>
두 남자는 포조와 럭키와 산만한 대화를 끝없이 이어간다. 포조와 럭키가 누구인지, 무슨관계인지, 어떤 행동을 하는 지는 상관없다. 두 남자는 고도가 오기까지 시간을 때워야 한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는 말상대가 필요하다.
마침내 고도를 잘 안다는 소년이 나타난다. 그가 말한다.
“고도 선생님이 오늘 저녁에는 못 오셔도 내일은 꼭 오신다고 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고도가 누구인지가 궁금해 긴 지루한 시간을 견뎌온 온 관객들로서도 허탈한 결말. 이 작품이 파리에서 초연됐을 때 “무슨 연극이 이러냐”는 평론가와 관객의 비판이 봇물 이룬 것도 이해할 만하다.
두 남자는 무대를 떠나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블라디미르는 말한다.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이라곤 없네. 고도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기다렸던 침체는 오지 않았다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언젠가 올 것이라며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내. 이같은 막연한 기다림은 최근 경제에 파생돼 주목받았다.
지난해 3월 레이 패리스 크레디트스위스(CS)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현 경제 상황에서 경기 침체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오지 않는 고도와 같다”고 말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가 인용보도했다. 2022년부터 꾸준히 전망됐던 미국 경기침체가 실제 빨리 닥치지 않고 있는 상황을 빗댄 말이다 여기서 나온 신조어가 고도와 침체를 합한 ‘고도침체(Godot recession)’다. 당시 월가 전문가들은 미국의 경기 침체 가능성을 높게 보면서도 발생 시점에 대해서는 ‘아마도 6개월 안에’라고 모호하게 답했다. 패리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월가 전문가들은 ‘6개월 안에 경기 침체가 올 것’으로 예측해왔는데 올 상반기에도 같은 전망을 반복해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2022~2023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금리를 매우 빠른 속도로 올렸다. 4차례 연속 자이언트스텝(한번에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인상)을 잇달아 단행하면서 제로수준의 금리가 5%를 훌쩍 넘어버렸다. 급등한 물가를 잡기 위한 조치였지만, 이같은 유례없이 빠른 긴축은 곧 경제에 상당한 파급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됐다. 고금리는 대출금리에 반영되며 가계, 기업 대출을 위축시켜 경제를 위축시킬 수 있다.
문제는 ‘언제’였다. 금리인상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시차가 있다. 통상적으로 6개월이면 금리인상의 여파가 반영될 것으로 봤다. 경제학자들은 매번 발표되는 고용, 물가, 생산, 소비 등 주요지표에 주목을 했지만 미국 경기는 연말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올들어 월가에서는 “침체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반박도 나오고 있다.
WSJ는 미국의 경기침체가 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코로나19 지원금으로 저축을 쌓은 미국 가계의 소비력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주요이유 중 하나로 들었다. 소비가 좋으면 투자 수요가 커져 금리가 높은 수준에 머물 수도 있다.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은 “경제는 계속 견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이는 금리가 더 높게 더 길게 머물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는 황소상
경제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한국도 있었다. 정부는 지난해 한국 경제를 ‘상저하고’로 내다보며 하반기 경기반등을 기대했다. 지난해 한국의 연간 경제성장률은 1.4%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정부의 최초전망치(2.5%)에 크게 못미치는 것으로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일본(1.8%)보다도 성장률이 낮은 성적표다. 정부는 지난해 상반기보다는 하반기가 상대적으로 나았다는 점에서 ‘상저하고’가 맞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기다렸던 고도(경제성장)가 온 것을 국민들이 체감했느냐는 다른 문제다.
막연한 기다림, 그 본질에 대한 이야기
다시 연극으로 가보자. 2막에서도 막연한 기다림은 이어진다. 다시 소년이 나타나 “고도 선생님은 오늘 안오십니다”라고 전한다. 이제 나무 말고는 모든 것이 죽었다. 두 사람은 목매달 생각을 하지만 매달 끈이 없어 죽지도 못한다.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으면 두 사람은 진짜로 목을 매기로 한다. 두 사람은 간만에 의기투합했다. 블라디미르는 말한다. “자 우리갈까” 에스트라공은 답한다. “그래 우리 가세” 하지만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연극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사람이 간절히 기다리던 고도는 도대체 누구일까. 고도는 하느님(God)을 상징할 수도, 우리의 희망(Hope)을 상징할 수도 있다. 저자인 베케트는 2차대전 당시 겪은 피신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자신의 상황을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기다림으로 형상화했다는 분석이 있다.
답이 무엇이든 베케트는 생전에 ‘고도’가 무엇인지를 정의하지 않았다. 결국 고도찾기는 관객 각자의 몫으로 남은 셈이다. 2024년 한국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