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학 전 BNK자산운용 대표

일본 고전문학을 대표하는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는 헤이안 시대의 막을 내리게 한 사무라이 가문들 간의 전쟁이 배경이다. 천황 승계 문제로 다이라 가문(平家·헤이케)과 미나모토 가문(源氏·겐지) 사이에 이른바 ‘겐페이전쟁’(源平合戰)이 일어난다. 우리가 흔히 당구 등 스포츠에서 편을 나눠서 경쟁하는 방식인 겐페이가 여기서 유래했다. <헤이케 이야기>는 용맹함과 대담함, 충성과 배신 등으로 가득 찬 대서사시 같은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관점은 제목에서 보듯이 승자가 아닌 패자인 ‘헤이케’다. 이전에 영광을 가졌으나 결국 무너진 헤이케인 것이다. 이를 두고 <일본의 굴레>를 쓴 태가트 머피는 대의와 가문을 위해 비록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죽어가는 ‘고귀한 패자’라고 했다. 그것이 사무라이 정신의 원형이 되었다.

지금 일본이 어렵다. 일본 경영계의 구루로 불리는 오마에 겐이치는 ‘5년 안에 초우량 기업으로의 성장이 예상되는 기업을 쓰세요’라고 하면 일본에서는 10명 중 9명이 ‘도요타자동차’를 쓴다고 말한다. 20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전에도 그랬다. 그런데 일본인의 긍지였던 도요타가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판매 1위, 품질의 대명사 도요타가 국가 인증 과정에서 부정을 저질렀다고 한다. 최근 도요타 주가는 2개월 반 만에 15%나 하락했다. 이것은 하나의 시그널에 불과한 것일까?

사실 일본 경제는 구조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슈퍼(Super) 엔저’는 과거와 달리 수입을 키워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는 3.1%로 1982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근저에는 엔저로 인한 수입물가 상승이 자리 잡고 있다. 물가 상승은 개인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고 결국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다시 마이너스로 추락하고 있다. ‘잃어버린 30년’ 동안 진행되어온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이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상승)으로 전환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독일에 밀려 4위로 내려앉았고, 1인당 국민소득(GNI)은 사상 처음으로 한국에 추월당했다.

그래서 ‘제2의 플라자 합의’를 해야 할지 모른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40년 전, 달러 강세를 꺾기 위해 엔화의 인위적인 통화가치 절상을 유도했던 조치를 지금 다시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다른 통화에 비해 엔화의 약세폭이 가장 컸다. 2020년 말 이후 한국 원화도 27%나 절하되었지만, 일본 엔화는 절하율이 무려 54%나 된다. 3년 반 만에 엔화 가치가 반 토막이 나서, 실질 실효환율지수는 57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 국민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다. 일본의 실질임금은 25개월 연속 감소했고, 가계저축률도 2021년 6.6%에서 지난해 0.1%로 뚝 떨어졌다.

우리가 당장 죽을 지경인데, 일본을 걱정하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너무나도 일본이 걸어온 길과 닮아 있다. 전후 ‘일본의 기적’을 이룬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모델은 더 진화되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재벌 중심의 산업구조,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 심지어 고령화 추세까지 판박이다. 한국의 실질 GDP 성장률은 1970년 이후 30년 평균이 8.8%이지만, 2000년 이후 23년간 평균은 3.5%이다. 2분의 1 이하로 줄었다. 그런데 2020년 이후 체감하는 성장률은 2%대이다.

일본의 실패는 본질적인 기업과 산업의 구조혁신 없이 가격만 낮춘(엔저) 결과이다. 문제는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새로운 상품과 시장을 개척하는 선도기업)가 아닌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새로운 상품, 신기술을 빠르게 쫓아가는 기업) 전략에 한계가 오고 있다. ‘5년 안에 초우량 기업으로의 성장이 예상되는 한국 기업을 쓰세요’라고 하면 10명 중 9명은 어느 회사를 쓸까? 과거에 영광을 누리던 도요타와 일본을 보면서, 한국에 투영되는 것은 ‘고귀한 패자’의 그림자인가?

이윤학 전 BNK자산운용 대표

이윤학 전 BNK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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