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앵글로아메리칸 제련소에서 구리 금속조직이 액체로 용융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칠레 앵글로아메리칸 제련소에서 구리 금속조직이 액체로 용융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10원짜리 동전, 놋그릇, 동메달로 익숙한 구리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전 세계에 불어닥친 인공지능(AI) 열풍과 신재생에너지 전력망 확장 속에 구리가 핵심 자원으로 부상하면서다.

구리는 전기와 열이 잘 통하고 가공하기 쉬운 데다 부식에도 강해 전기를 실어나르는 전선·케이블, 동파이프와 같은 건축자재 등 산업 전반에서 사용돼왔다. 비전통 분야의 구리 수요는 전기차가 등장하면서 늘기 시작했다. 최근 AI 운영에 필수인 데이터센터 구축이 늘면서 앞으로 구리 수요는 급증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장재혁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2020년대 부상한 비전통 구리 수요만으로 2030년 연간 약 1106만t의 추가 구리 수요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올해 상반기 구리 가격 역대 최고가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기차 1대를 만드는 데 필요한 구리는 약 80㎏으로 휘발유 차량보다 평균 3~4배 더 많이 들어간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노후화된 전력망 강화에 4조7000억달러(약 6500조원)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독일·영국 해저케이블 연결, 사우디아라비아의 네옴시티 건설 등 전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전력망 구축 사업이 한창이다. 태양광 및 풍력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서도 대용량의 구리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빅테크 기업들이 AI 가동을 위한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면서 대량의 구리가 투입되고 있다. 미국 구리개발협회(CDA)에 따르면 데이터센터 구축에는 1메가와트() 당 27t 규모의 구리가 쓰인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미국 시카고에 설립한 198 규모의 데이터센터에는 2177t의 구리가 사용됐다.

제프 커리 칼라일그룹 에너지부문 최고전략책임자는 지난 5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구리는 새로운 석유”라며 “AI의 출현,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증가, 친환경 에너지 확대 등으로 구리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LS전선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동박용 신소재 큐플레이크. LS전선 제공

LS전선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동박용 신소재 큐플레이크. LS전선 제공

구리는 경기 흐름을 선행해 보여준다는 뜻에서 ‘닥터 코퍼(Dr. Copper·구리 박사)’로도 불린다. 수요가 폭증하면서 올해 들어 구리 가격은 역대 최고가를 갈아치웠다. 한국자원정보서비스에 따르면 지난 5월 구리 선물가격은 t당 1만857달러까지 치솟았다. 올해 초와 비교하면 27% 넘게 상승한 수치다.

이승훈 한국비철금속협회 본부장은 “구리 수요는 앞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공급은 제한적이다 보니 하반기에 구리 가격은 더 올라갈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커리 칼라일그룹 최고전략책임자는 구리 가격이 t당 1만50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추산했다.

이 때문에 전선 업계에서는 안정적인 구리 확보를 위해 구매처를 다양화하고 장기 계약을 체결하는 등 원재료 조달이 최대 현안이 됐다. LS의 비철금속소재기업 LS MnM은 지난달 세계 최대 광산 기업인 BHP와 향후 5년간 173만t의 동정광을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최근 정부도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5조원 규모의 공급망 기금 지원을 시작하고 2027년까지 ‘공급망 안정화 기본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5월에는 한·칠레 자원협력위원회가 12년 만에 재개하기도 했다. 경제안보 차원에서 정부가 해외 광산 지분을 늘리고 민관협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한국 기업이 보유한 핵심 광물 광산 수는 36개로, 미국(1976개), 중국(1992개)과 차이가 크고 일본(134개)보다도 적은 것으로 조사됐다.

업계 관계자는 “선진국들에 비해 한국의 자원 개발은 상대적으로 미진하고 정부가 바뀔 때마다 흐지부지되기 일쑤”라며 “지금부터라도 해외 광산에 대한 지분 투자에 적극 나서고 국내 관련 업체에도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리 수요 강세에도 불안한 공급망

전 세계적으로 구리 수요가 증가하고 있지만 정작 구리광산은 문을 닫거나 생산량이 줄고 있다. 칠레 국영 광산기업 코델코는 지난해 물 부족 등의 여파로 25년 만에 가장 적은 양의 구리를 생산했다.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나날이 증가하는 구리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2031년까지 구리 생산이 45% 늘어야 한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국제금융센터는 지난 3월 보고서에서 “구리 광석 공급은 그동안의 미진한 투자에 따른 광산 노후화, 신규 광산 프로젝트 부족 등으로 단시일 내 회복이 어려워 보인다”고 했다.

주민들의 반대로 문을 닫은 구리광산도 있다. 파나마 코브레파나마 구리광산은 지난해 12월 폐쇄됐다. 파나마 대법원이 파나마 정부와 광산개발업체인 미네라파나마가 체결한 광산 개발 계약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지역 주민들은 광산개발 계약 조건이 캐나다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며, 지역 내 물 공급을 위협하고 환경을 오염시킬 것이라며 반발해왔다.

구리 수요가 급증하는 만큼 관련 기업에서는 환경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온다. 우선 광산에 폐수 정화시설을 설치해 유해물질을 제거하고, 미생물을 이용해 구리를 추출하는 등 친환경 채굴 기술을 개발·도입해 화학약품 사용을 줄이는 방안이 거론된다. 광산 운영이 끝난 후엔 지역 사회와 함께 생태계를 복원하는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최근에는 자연을 해치지 않고 폐기된 전자제품, 자동차, 건설 폐기물 등에서 구리나 니켈 등을 추출해 재활용하는 ‘도시광산’이 천연광산만큼 중요한 자원 공급망으로 주목받고 있다.

애플은 로봇 데이지를 통해 15개의 아이폰 모델을 분해해 자원을 재활용하고 있다. 아이폰 15와 맥북 프로 16에는 100% 재활용 구리를 사용한 주요 열 관리 시스템을 도입했다. 고려아연은 사용이 끝난 태양광 패널을 재활용해 구리, 알루미늄 등을 추출하는 도시광산 사업을 통해 구리 생산량을 2028년까지 5배로 늘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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