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과 리엑턴스효과
사랑이 절정에 이를 때 눈이 멀고, 귀가 닫긴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주변의 시선은 거리낄게 없고, 어느 누구의 조언도 들리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직 그고, 들리는 것은 오직 그의 음성이다. 시간은 그렇게 멈춘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설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에 미쳤다고 해도 좋고, 사랑에 중독됐다고 해도 좋다. 저자는 이 감정을 ‘단순한 열정(Passion Simply)’이라고 표현했다. 이 두 단어는 소설의 제목이 됐다. 사랑이 절정인 단계에서 세상은 단순해 진다. 그가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 세상은 2진수처럼 0 아니면 1만 존재할 뿐이다.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단순한 열정>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는 한 여자의 러브스토리를 담고 있다. ‘나’의 의지와 욕망, 행동은 모두 A와 관련된 것 뿐이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A와 관련된 것이 아니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A가 걸어온 전화 벨 소리를 듣지 못할까봐 진공청소기도 헤어드라이어기도 사용하가 꺼려진다.
A가 전화를 걸어와서야 비로소 나는 제정신을 찾는다. 한 시간 뒤 그가 올때까지 유리잔을 꺼내놓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집을 정돈하며 기다린다. 화장을 하고 머리손질을 끝낸뒤 A와 나눌 대화와 몸짓을 상상한다. A와 보낼 뜨거운 한나절은 나의 인생에서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죽어도 상관없는 열정
나는 A와의 에로틱한 사랑을 감추지 않는다. A가 떠난 뒤 음식부스러기가 남아있는 접시,담배 꽁초가 수북히 쌓은 재떨이, 방바닥과 복도에 흩어져 있는 겉옷과 속옷, 카펫에 떨어진 침대 시트마저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흔적이다. 나는 독백한다. 그 물건들은 하나하나 어떤 몸짓이나 순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쾌락의 시간이 끝나고, 몽롱한 상태에서 서서히 벗어나면 나는 다시 A의 전화를 기다린다.
소설가인 나에게 A에 대한 열정은 한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같다. 몇달에 걸쳐 글이 완성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다한다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사랑은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대놓고 드러내기 어렵다. A는 외국인, 연하, 무엇보다 유부남이다.
나는 A로부터 꽃이나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때로 행동을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A에게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내거나 선물을 할 수도 없다. 그 사람이 한가할 때나 만날 수 있다. 그 사람을 만난 뒤에는 나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지 신경쓴다. A에게는 아내가 있다.
아들에게는 A와의 관계를 말했다. 하지만 아들이 나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아들은 엄마를 수고양이를 따라다니는 ‘발정난 암고양’이 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들에게조차 떳떳할 수 없는 사랑이다.
리엑턴스효과, 금지된 것을 탐하다
정상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집착이라는 점에서 나의 A에 대한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과 닮았다. 치명적인 사랑 중에는 때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많다. 우리는 왜 금지하면 더 갖고 싶어질까. 이는 심리학과 행동경제학에서 ‘리엑턴스 효과’로 설명한다.
리엑턴스효과(reactance effect)란 금지된 것일수록 더욱 소유하고 싶어 하는 심리다. 리엑턴스효과는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위협당을 때 그 제한에 저항하려는 동기를 설명한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사랑이 외부요인으로 인해 제약을 받으면 자신의 사랑을 자유롭게 표현하거나 충족하는데 어려움을 갖게 된다. 이때 자신의 자유를 회복시키기 위해 제한에 저항하며 자신의 감정을 더 강렬하게 느끼고 표현하려는 행동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더 깊은 사랑에 빠지거나 집착할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샤론 브램(Saharon Brehm)은 다른 높이의 벽 위에 장난감 두 개를 놓아두고 아이들의 반응을 관찰했다. 아이들은 손쉽게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낮은 벽 위의 장난감에 대해서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뛰어올라야만 할 정도의 높은 벽 위의 장난감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주변을 맴돌며 만지고 싶어했다고 한다.
백곰효과, 반동효과, 칼리굴라 효과
사회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Daniel Wegner) 하버드대 교수의 흰곰 실험도 비슷하다. 그는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A그룹에게는 흰곰을 생각하라고 했고, B그룹에게는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뒤 그들에게 흰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고 했다. 종을 친 횟수가 많은 쪽은 B그룹이었다. 이를 백곰효과 혹은 반동효과(rebound effect)라고 부른다. 어떤 생각을 억제하면 그 생각을 더 많이 하는 현상으로 회피하려는 생각과 억압이 더한 집착을 낳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리엑턴스효과와 닮았다.
금지가 되레 집착을 불러 일으킨 사례는 현실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1979년 미국 보스턴시는 칼리굴라 황제의 생애를 그린 영화 <칼리굴라>의 상영을 금지했다. 폭군으로 알려진 로마제국 제3대 황제인 칼리굴라(본명 가이우스 케사르)의 이야기로 잔혹한 장면과 성적묘사가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의 상영금지령은 오히려 시민들에게 폭발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상영이 허용된 도시에서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 이 헤프닝은 ‘칼리굴라효과’라는 용어도 만들어냈다.
소비사회에서는 금지된 욕망도 마케팅에 이용된다. 선착순 혹은 한정판으로, 혹은 매진임박이라는 문구는 리엑턴스효과를 겨냥했다고 보면 된다. 유명 브랜드를 팔다가 불황으로 문을 닫게됐다는, 365일 폐점 중인 가게도 있다. 앞으로 살 수 없다는 제약은 소비자에게 상품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다.
아니 에르노 소설 <단순한 열정>
‘여러가지 제약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
나의 독백이다. 나 스스로도 자신의 사랑의 원인을 아는 셈이다. 하지만 원인을 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원인에 대한 분석을 지금 상태를 스스로 설득하는데 쓴다. 그 사람이 자신을 욕망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고 한다. 그는 외국인이라 자신과 정서가 다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가 나로 인해 곤란해 지는 것은 싫어 더 배려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그와의 사랑이 이런 상태라도 오래 유지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A는 자신의 고국으로 떠난다. 6개월이 지났다.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에 온몸이 아프다. 그와의 기억 하나하나가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와 함께 있었던 그시간은 ‘삶이 아름다웠던 그 시절’이 됐다.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은 그에 대한 사랑을 최고조에 이르게 한다. 이때 그는 <단순한 열정>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써놓은글을 찬찬히 읽다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열정 속에 하루하루 살아갈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들이다.’
나는 A를 통해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사치란 모피코트를 입거나 바닷가 별장에서 사는 것이 아닌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질문 하나. 만약 외부적 제약이 없는 사랑이었다면 나는 A를 그토록 사랑할 수 있었을까. 나 역시 지난 2년간 행동이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이었다고 고백했다. 사랑은 참 미묘하고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