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 규소(Si)를 뜻하는 실리콘은 ‘산업의 쌀’ 반도체의 중요한 원재료입니다. ‘실리콘밸리’처럼 정보기술(IT) 산업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김상범의 실리콘리포트’는 손톱만 한 칩 위에서 인류의 미래를 이끄는 전자·IT 업계 소식을 발빠르게 전하는 칸업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해 주세요!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AFP연합뉴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AFP연합뉴스

오랜 우정에 금이 가는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치도 그중 하나다. 즐겁게 만난 자리에서 친구와 정치 이야기로 얼굴을 붉히다 급기야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리는 일은 대선 같은 큰 선거를 앞두고 종종 벌어지곤 한다.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수 세대가 먹고살 만큼의 부를 축적한 억만장자들도 그렇다. 수십년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동고동락해온 ‘기술 엘리트’들이 11월 대선을 앞두고 대립각을 세우며 분열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와 공공장소에서 서로를 날선 목소리로 비난하며, 지지 후보를 응원하기 위해 거금을 쾌척하며 세몰이를 하기도 한다.

■‘우리는 해리스 편’···우경화 분위기에 맞불

“우리는 친기업, 친아메리칸 드림, 친기업가 정신, 친기술적 진보를 지지한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실리콘밸리 투자자 200여명이 11월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투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이 낸 공개 성명에는 민주당의 오랜 후원자로 알려진 링크드인 공동창업자 리드 호프만, 오픈AI에 투자한 벤처캐피털(VC) ‘코슬라벤처스’의 비노드 코슬라 창업자, 가상화폐 투자자 마크 큐번, 또 다른 VC 투자자 론 콘웨이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의 세 과시는 100일도 남지 않은 미국 대선에서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미국 테크 업계의 ‘트럼프 대세론’에 정면으로 맞불을 놓았기 때문이다. 지난달 13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총격 사건 이후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가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를 천명하며 매달 4500만달러(약 623억원)를 기부한다고 밝힌 데 이어, 페이팔 공동창업자 피터 틸과 벤처투자자 마크 앤드리슨, 벤 호로비츠 등이 잇따라 합류했다.

미국 기술 업계는 전통적으로 진보 성향이 강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특히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샌프란시스코는 히피, 이민자, 성소수자들이 모여드는 진보 정치의 성지나 다름없다. 2012년 대선에서 구글·애플·이베이 등 빅테크 직원들이 낸 기부금의 90% 이상이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에게 몰릴 정도였다.

하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었다.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 역할을 하는 연방거래위원회(FTC)가 애플·구글 등의 반독점 행위에 칼을 빼들었고 바이든 대통령은 대기업 법인세 최저세율을 높이는 ‘부자 증세안’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아울러 인공지능(AI) 안전성을 높이겠다며 정부가 추진 중인 각종 규제 또한 실리콘밸리 민심을 돌아서게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법인세 인하를 공약으로 제시하고 있다. “미국을 비트코인 수도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며 암호화폐 업계의 민심도 사로잡았다.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VC 투자자 출신 J.D. 밴스 또한 실리콘밸리 인사들과 폭넓은 인맥을 갖추고 있다. 머스크와 틸 등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밴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목하도록 강도높은 로비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기업인·투자자들이 공개적으로 정치인·정당을 응원하는 모습은, 표면적으로나마 기업들이 정치와 철저히 거리두기를 하는 한국에 비춰보면 생경한 풍경이다. 그 이면에는 상한선 없이 무제한 정치헌금을 모을 수 있도록 한 ‘슈퍼팩’ 제도가 있다. 투명하게 돈 내고 자유롭게 발언하는 문화가 활성화된 배경이다. 기업·시민단체 등 외부 세력을 대하는 양국 정치권의 태도 차이도 있다. 미국 정치 전문가인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국내 정당들은 선거를 앞두고 기업인 출신을 개별 영입하는 정도에 그치며, 미국처럼 정치연합 기반을 적극적으로 형성하려는 노력은 다소 부족하다”고 말했다.

미국 ‘페이팔 마피아’의 일원인 벤처투자자 피터 틸(왼쪽)과 리드 호프만.

미국 ‘페이팔 마피아’의 일원인 벤처투자자 피터 틸(왼쪽)과 리드 호프만.

■“더 이상 대화 안 해” 분열 가속화

대선을 앞두고 실리콘밸리 내부의 분열도 깊어지고 있다. ‘페이팔 마피아’들의 불화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온라인 결제서비스 기업 페이팔의 초기 멤버들로, 회사를 떠난 이후로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실리콘밸리의 사람과 자금을 움직이는 큰손으로 거듭난 인물들이다. 트럼프 편에 선 투자자 데이비드 삭스와 머스크, 틸을 비롯해 이번에 해리스 지지를 선언한 호프만 등이 그 일원으로 꼽힌다.

지난달 10일 열린 미국 부호들의 사교모임 ‘선밸리 콘퍼런스’에서의 말다툼이 결정적이었다. 이날 호프만은 “트럼프를 지지하기 때문에 더 이상 틸과 대화하지 않는다”고 공개 발언을 했다. 그 자리에 있던 틸은 벌떡 일어나 트럼프를 상대로 한 소송에 호프만이 자금을 지원한 사실을 들면서 “당신이 트럼프를 순교자로 만들어줬다. 감사하다”며 조롱했다. 호프만은 “진짜 순교자가 됐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1987년 스탠퍼드대 철학 수업에서 만나 30년 넘게 인연을 맺어온 두 사람이 틀어진 모습을 지켜본 한 참석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상했고, 그저 슬펐다”고 전했다.

그동안 실리콘밸리 내부에서 정치적인 다툼은 최대한 삼가던 분위기였다. 언제 비즈니스 관계로 마주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사회의 극심한 이념 대립이 이 분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이 같은 정치 몰입이나 ‘우클릭’ 현상은 보편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는 반론이 나온다. 미국의 한 플랫폼 기업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는 “돈 많은 창업주·억만장자들이 최근 트럼프를 전격적으로 지지하면서 유독 돋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발언권이 큰 사람들 때문에 착시 현상이 빚어졌다는 이야기다. 메타·구글·애플 같은 대표적인 기업들이 특정 진영으로 이동했다는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미 인터넷매체 복스는 “여전히 대다수의 기술 전문가들은 부의 재분배, 임신 중지, 성소수자 권리 등에서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지지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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