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전 11시20분, 기자는 취재원과의 오찬 약속에 앞서 회사 근처 은행으로 향했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보이스피싱 예방사업 ‘여신거래 안심차단’ 서비스에 직접 가입해보기 위해서다. ‘비대면’으론 가입이 불가능한 탓에 은행을 직접 가야 했다. ‘피 같은’ 시간을 은행에서 보낸다는 것 자체가 썩 달갑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6분35초면 충분했다. 지점 문 열고, 번호표 뽑고, 가입 완료까지 걸린 총 시간이다. 창구에 신분증을 건넨 뒤 서류에 서명 몇 번 했을 뿐인데 “끝났습니다” 한다. 이로써 보이스피싱, 명의도용 등으로 ‘나도 모르는 대출’이 실행될 가능성은 ‘0%’가 됐다. 은행을 떠나며 담당 직원에게 물었다. “가입하러 오는 사람이 많나요?” 돌아온 답변은 이랬다. “고객님이 처음이에요.”
지난달 23일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이 야심차게 출시한 ‘여신거래 안심차단’ 서비스 가입률은 실제로 저조했다. 10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지난달 23일부터 지난 4일까지 영업일 10일간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여신거래 안심차단서비스 가입 건수는 은행별로 3000~7500건에 불과했다. A은행은 7500건으로 가입이 가장 많았지만, 이 은행에 하루 7만명이 방문하는 것을 감안하면 일평균 700여건의 가입은 현저히 적다. 다만 저조한 가입률을 의식한 금감원이 은행권과 홍보에 나서면서 최근에는 가입이 늘고 있는 추세다.
‘여신거래 안심차단’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여신거래로 피해를 입지 않도록 신용대출· 카드론·신용카드 발급 등 개인의 신규 여신거래를 일괄 차단하는 서비스다. 시중은행뿐 아니라 저축은행·상호금융권 등 전국 4012개 금융회사가 참여해, 한 곳에서 가입해도 금융권 전체 대출을 한꺼번에 막을 수 있다.
해당 서비스가 출시된 배경에는 최근 급증하는 보이스피싱 피해가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5월까지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2563억원으로 전년 동기(1713억원) 대비 50% 증가했다. 특히 금감원 등 기관을 사칭하는 수법은 전년보다 15% 감소한 반면, 대환대출 등 대출빙자형 수법은 61% 급증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여신거래 안심차단’은 보이스피싱을 통한 불법대출 피해를 원천 차단한다는 점에서 실효성 있는 예방책이다. 그럼에도 가입률이 저조한 이유는 뭘까. 일단 ‘지점 방문’ 자체가 장벽으로 작용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사업시행 초기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지점을 찾는 고객 자체가 연령대가 높은 특정 계층을 제외하면 많지 않아 서비스 가입률이 저조한 편”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피해 대출은 담보가 아닌 신용대출이 주인데, 차단서비스를 이용하면 선제적으로 막히는만큼 예방적 차원에서 좋은 서비스”라면서도 “보이스피싱 타겟이 연령대를 가리지 않는만큼 가입 방법이 달라져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점 방문’의 장벽은 서비스 해지 시에도 문제가 된다. “조만간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고 했는데, 그때도 은행에 다시 와야 하나요?” 가입을 마친 후 창구 직원에게 묻자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신용카드를 발급하거나 대출을 받는 등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은행 지점을 재방문해 해지 신청을 해야 한다는 번거로움도 있는 것이다. 한창 경제 활동이 활발한 젊은 세대의 경우 가입을 망설이게 되는 주된 이유다.
가입, 해지 모두 지점 방문이 불가피하기에 보이스피싱 피해에 주로 노출되는 고령층의 경우 자녀 등을 통한 대리 가입을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기자가 이용한 은행 창구 직원은 “미성년자 등의 법정대리인에 한해서만 대리 가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결국 전 연령대가 손쉽게 보이스피싱 불법 여신대출을 예방하기 위해선 비대면 서비스가 나와야 한다. 금융위와 금감원은 이와 관련한 제도 개편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시간은 좀 걸릴 수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비대면 신청이 하나의 기관으로 몰릴 때 발생할 트래픽 문제 등을 감안해 제도 도입을 준비 중”이라며 “조만간 전 금융권에 대한 비대면 신청은 오픈할 수 있다”고 말했다.